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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와 호서대학 대학원에서 신학을, 중앙대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 철학박사(Ph. D. 북한교회사 전공) 극동방송 근무, 성세감리교회와 목양감리교회 담임. 호서대 인문대학 겸임교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객원교수 역임. 현재 북한교회연구원(NCRC) 원장 한국기독교통일포럼 상임대표 외. 저서 <평화통일과 북한복음화> 외 다수

  제목 : (0105) 곽산(郭山)교회(평북)


            
                                                  곽산교회
                             -3․1만세운동 때 교회당이 불탄 교회-



곽산교회는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에 있었는데 곽산면은 원래 군이었다가 1914년에 정주군에 편입되었다.
‘곽산’이라는 이름은 ‘성곽이 있는 고을’이라는 뜻이다.
1952년에 북한 당국이 행정구역을 크게 개편할 때 곽산은 다시 군이 되었다.
곽산군의 많은 부분이  해안지역이고 기계공업이 발달해 있다.
곽산군의 곽산연결농기계공장에서 생산되는 농기계들이 평안북도 전역에  공급되고 있다.

            
                  ▣ 서북차별정책이 교회부흥의 요인이 되다 ▣


곽산이라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1811년에 일어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다.
홍경래는 가산(嘉山: 지금의 박천군) 다복동(多福洞)에서 봉기했다.
가산 다복동은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박천군 상봉리(三峯里)이다.
다복동의 원래 이름은 마전동(麻田洞)인데 홍경래가 여기에서 농민군을 모집하기 위해 ‘이곳은 금이 많이 나는 복된 마을이다’라고 선전해서 다복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홍경래는 봉기해서 제일 먼저 가산과 곽산의 관아를 점령했다.
창고를 열어 곡식을 풀어 빈민을 구제하고, 무기를 탈취해서 무장을 강화하고 서울을 향해 진격했다.

홍경래가 난을 일으킨 이유는 서북 지역에 대한 차별대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서북 지역을 심하게 차별했지요. 「택리지(擇里地)」라는 인문지리서가 있는데 여기에 “평안도는 300년 이래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없었고 서울 사대부(士大夫)는 이들과 혼인하거나 벗하지 않는다.”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이런 서북 지방에 복음이 들어가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니까 사람들이 빠르게 받아들였다.
조선왕조의 서북차별정책이 서북지방이 한국기독교, 특히 장로교의 중심이 되게 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다.

지금 북한에서는 홍경래에 대해 그저 “평안도 농민전쟁의 지휘자”로만 소개하고 있다..
홍경래에 대한 설명 가운데 ‘폭동을 일으켰다’, 이런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를 그리 높이 평가하는 것 같지는 않은 것 같다.
              

곽산교회는 1900년에 설립되었다.
곽산 서부 지역 해안지역의 염방(濂坊)에 강제건(姜濟建)이라는 분이 살았는데 이 분이 예수를 믿고 열심히 전도해서 여러 사람이 믿었다.
이 분들은 처음에 유동(柳洞)에 임시집회소를 설치하였다가 조산동(造山洞)에 큰 예배당을 건립했다.
조산동은, 마을에 둥그런 산이 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사람이 만든 것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아, 홍성익 선생! ▣

곽산교회는 계속 부흥했다.
곽산교회는 1904년에 교인 자녀들을 가르치기 위한 학당을 세웠다.

1919년에 3‧1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곽산에서도 교회가 중심이 되어 3월 6일에 만세를 불렀다.
곽산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분은 홍성익(洪性益) 선생인데 이 분은 곽산 염방 출신으로 평양 숭실학교 졸업생이고, 신민회 회원이며 선천 신성학교 교사를 지냈다.
일본 당국이 서북지역의 민족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1912년에 ‘105인 사건’이라는 것을 일으켰는데 그 때 체포되어 옥고를 겪었다.
홍성익 선생은 3․1만세운동 후에도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던 끝에 세상을 떠났다.
일본 당국은 곽산 지역의 만세운동을 잔혹하게 탄압했다.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었는데 일본 군인들은 들짐승을 잡는 도구를 사용해서 사람들의 목숨을 빼았었다.
총알 중에 아연탄환(亞鉛彈丸)은 사람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기 때문에 사용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이 때 일본 군인들은 이 탄환을 사용했다.
그리고 일본 군인들은 곽산교회를 붙태워버렸다.

              
                              ▣ ‘라디오’라는 별명의 나부열 선교사 ▣

초기에는 로버츠(S.L. Roberts; 羅富悅) 선교사가 곽산교회를 담임했다.
로버츠 선교사는 1907년에 한국에 와서 선천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이 때 곽산교회를 돌본 것이다.
로버츠 선교사는 1913년에 평양장로회신학교 신약 교수로 부임했고 1924년에는 제2대 교장이 되었다.
이 분의 별명은 ‘라디오’였다.
‘이랬디요’ ‘했디요’ 이런 말을 많이 썼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이 분은 신구약성경을 거의 암송하고 있어서, 학생들이 질문하면 성경 몇 장 몇 절을 보라고 대답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일본 당국이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이에 따르지 않으면 학교의 문을 닫게 하겠다고 할 때 로버츠 선교사는 신사참배하면서 학교를 유지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폐교의 길을 택했다.

1919년에는 김진근(金振瑾) 목사가 부임했다.
김 목사는 평양장로회신학교 3회(1910년) 졸업생인데 목사 안수를 받고 서간도 지역에서 목회하면서 교회와 학교를 여럿 설립했다.
김진근 목사가 곽산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3․1만세운동이 일어났고, 김 목사는 이 일로 2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1920년에 이시웅(李時雄)목사가 부임했다.
이 목사님은  3․1 만세운동 때 불탄 교회를 3년에 걸쳐 새로 지었다.


                                   ▣ 최관흘 목사   ▣

그 다음에 최관흘(崔寬屹) 목사가 부임했다.
앞에서 곽산교회는 염방에 사는 강제건이라는 분의 전도로 세워졌다고 했는데 최관흘 목사가 염방교회 설립자이다.  
최관흘은 곽산교회 초대 장로로 수고했고, 1909년에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제2회로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한국장로교는 1907년에 7명에게 첫 번째 안수를 주었고, 1909년에 여덟 명에게 두 번째로 안수를 주었는데 최 목사는 그 가운데 한 분이었다.
최관흘 목사님은 시베리아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열심히 선교활동을 했다.  
그러나 현지의 여건이 너무 어려웠는데  특히 러시아정교회의 핍박이 심했다.
최관흘 목사는 결국 1913년에 러시아정교회로 개종을 했다.
장로교회에서는 조사단을 파견했고, 최관흘 목사는 면직을 당했다.
그러나 얼마 뒤에 복직되어 1923년에  장요구(長要區)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정확한 기록은 찾기 어렵지만 아마 그 다음에 곽산교회를 담임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최관흘 목사에 대한 뒷이야기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는데 평양에 살다가 월남한 분 가운데, 해방 뒤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했는데 매우 점잖은 한국인 통역장교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자기가 최관흘 목사의 아들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는 분이 있었다.

1935년에 김홍식(金弘植) 목사가 부임했다.
김홍식 목사는 평양장로회신학교 제19회 졸업생(1926년 졸업)이다.
곽산교회는 장로교 평북노회에 속해 있었는데 김홍식 목사는 평북노회장을 지냈다..
김 목사가 노회장으로 있던 1939년에 정주와 박천 일대의 교회들을 가지고 평북노회에서 평동노회(平東老會)가 분립되었는데 김홍식 목사는 평동노회 초대노회장이 되었다.

곽산교회의 주소는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조산동 402이었다.
이곳의 현재 행정구역은 평안북도 곽산군 곽산읍이다.  
곽산읍의 서부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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