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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와 호서대학 대학원에서 신학을, 중앙대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 철학박사(Ph. D. 북한교회사 전공) 극동방송 근무, 성세감리교회와 목양감리교회 담임. 호서대 인문대학 겸임교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객원교수 역임. 현재 북한교회연구원(NCRC) 원장 한국기독교통일포럼 상임대표 외. 저서 <평화통일과 북한복음화> 외 다수

  제목 : (0103) 원장(院場)교회(평남 대동군)



                                                원장교회
                               -3․1만세운동을 가장 치열하게 벌인 교회-


원장교회는 평안남도 대동군에 있었는데 대동군은 평양의 만경대구역․형제산구역, 그리고 공항이 있는 순안구역과 붙어 있다.
평양의 서부지역에는 예전에는 대동군이었다가 평양으로 흡수된 곳들이 많다.

대동군에는 교회들이 많았다.
1929년말 대동경찰서에서 작성한 기록을 보면 대동군 안에는 장로교가 53개, 감리교가 2개, 교인이 6,543명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1938년에는 교회가 78개로 늘어나 있었다.
대동군에 김형걸(金亨杰) 장로가 있었는데 이 분은 대동군 안에 20여 개의 교회를 세웠다.
김형걸 장로는 성경지식이 풍부했고, 성품이 매우 강직해서 ‘호랑이 장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 3․1 만세 시위에 앞장 서다 ▣

원장교회는  임찬모(林贊謨)라는 분이 전도해서 세워졌다.
임찬모의 전도로 믿게 된 분들이 처음에는 안양동(安養洞)교회에 출석했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1900년에 원장교회가 세워졌는데, 처음에는 김은칠(金恩七)이라는 교인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포합동(浦合洞)에 예배당을 지었다.

예전에는 교회들이 학교를 세우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일교일교(一敎一校: 한 교회에 학교 하나)라는 말도 생겨날 정도였는데 원장교회도 1909년에 합성(合成)학교를 세워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3․1만세운동 당시에 가장 치열했고 또 희생자가 많이 발생했던 시위가 원장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벌어졌다.
원장교회에서 가까운 반석교회에 조진탁(趙振鐸) 장로가 있었다.
반석학교를 설립해서 운영하는 분인데 이 분이 일이 있어 평양에 갔다가 평양만세시위에 참가하게 되었다.
조진탁 장로는 원장에서도 만세시위를 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품고 돌아와서 원장교회 장로들과 의논하고, 이들은 인근에 있는 반석(盤石)교회, 산수(山水)교회, 사천(沙川)교회에 연락해서 네 교회가 힘을 합해 시위를 하게 되었다.
3월 4일 오전 10시에 원장교회에서 운영하는 합성학교 교정에 군중이 모였는데 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은 기도, 독립선언서, 독립선포연설 등의 순서를 마치고 시장터로 나가 만세를 불렀다. 규모가 아주 큰 만세시위를 벌인 것이다.

이들은 사천헌병대에 갇혀 있는 동지들을 구출하기 위해 행진했는데 헌병과 헌병보조원들의 사격으로 여러 명이 죽고 다쳤다.
이에 흥분한 군중에 의해 일본헌병 한 명과 보조원 세 명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일본 헌병의 부인이 군중들에게 잡혔는데 사천교회 송현근(宋賢根)목사와 조진탁 장로가 군중들을 만류해서 이 일본여인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여인이 강서로 도망가서 헌병대로에 이 사태를 알렸고, 이 보고를 받은 평양헌병대에서는 5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원장과 사천의 기독교인 400여 명을 체포했다.

일본 당국은 이 사건을 ‘사천폭동사건’이라고 부르면서 엄중하게 취급했다.
이 사건으로 평양에서 재판을 받은 사람이 49명인데 일심에서 사형언도를 받은 사람이 19명
이라는 사실 하나만을 보아도 일본이 이 사건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잘 알 수 있게 된다.


                                         ▣ 조진탁 장로 ▣

원장만세운동에 앞장섰던 조진탁 장로도 사형을 당했다.
조 장로는 만세시위 도중에 총탄을 맞아 부상을 당했다.
조 장로는 여러 곳으로 피신하면서 상처를 치료하다가 원산에서 체포당했다.
조 장로가 원산으로 간 것은 러시아로 탈출하기 위해서였다.
조 장로는 평양으로 끌려와서 평양형무소에 갇혔는데 이 때 독립운동을 하던 장남이 체포되어 진남포형무소에 갇혔다.
조진탁 장로는 1922년 10월 18일에 사형을 당했다.

사망한 교인들의 장례식은 3월 6일에 교회에서 있었는데 장례식이 끝난 다음에 만세 시위가 또 벌어졌다.
우리는 제암리교회 사건을 잘 알고 있는데 원장교회 사건과 제암리교회 사건을 3․1 만세운동 당시 2대 수난사건으로 꼽기도 한다.


                               ▣ 끝이 좋지 않았던 목사 ▣

원장교회 담임자에 대해서는 3․1 만세운동 당시 심익현(沈益鉉) 목사가 담임하고 있었다는 것 외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심익현 목사는 평양장로회신학교 7회(1914년) 졸업생인데 이 만세운동 때문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런데 심익현 목사는 끝이 좋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친일활동을 하면서 신사참배에 앞장섰고, 해방 후에는 북조선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해서 북한당국에 적극 협력했다.
당시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의 중심인물들 가운데는 이렇게 친일경력을 가진 분들이 여럿 있었다.

원장교회 출신으로 명신홍(明信弘) 목사가 있다.
명 목사는 뛰어난 목회자이며 목회행정가로 예장 통합과 합동이 분열하기 이전인 1954년에 장로교 총회장을 지냈다.
명 목사는 교수생활을 하면서 신학교육에도 많은 힘을 썼는데 총신대 학장을 지내기도 했다.

원장교회의 주소는 평안남도  대동군 김제면(金祭面) 원장리 403의 1호였다.
원장리는 교통의 요지였다.
역마(驛馬)들의 대기소와 숙박소가 있고, 큰 장이 서는 곳이기 때문에 원장리라고 했는데 대동읍의 중심부를 원장거리라고도 했고, 읍거리라고도 했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평양으로 가는 도로, 강서군으로 가는 도로, 평원군으로 가는 도로, 증산군으로 가는 도로가 다섯 갈래로 뻗어 있다.
이곳의 현재 행정구역은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읍이다.





(0103) 원장(院場)교회(평남 대동군)
원장교회
-3․1만세운동을 가장 치열하게 벌인 교회-



원장교회는 평안남도 대동군에 있었는데 대동군은 평양의 만경대구역․형제산구역, 그리고 공항이 있는 순안구역과 붙어 있다.
평양의 서부지역에는 예전에는 대동군이었다가 평양으로 흡수된 곳들이 많다.
대동군에는 교회들이 많았다.
1929년말 대동경찰서에서 작성한 기록을 보면 대동군 안에는 장로교가 53개, 감리교가 2개, 교인이 6,543명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1938년에는 교회가 78개로 늘어나 있었다.
대동군에 김형걸(金亨杰) 장로가 있었는데 이 분은 대동군 안에 20여 개의 교회를 세웠다.
김형걸 장로는 성경지식이 풍부했고, 성품이 매우 강직해서 ‘호랑이 장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 3․1 만세 시위에 앞장 서다 ▣

원장교회는  임찬모(林贊謨)라는 분이 전도해서 세워졌다.
임찬모의 전도로 믿게 된 분들이 처음에는 안양동(安養洞)교회에 출석했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1900년에 원장교회가 세워졌는데, 처음에는 김은칠(金恩七)이라는 교인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포합동(浦合洞)에 예배당을 지었다.
예전에는 교회들이 학교를 세우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일교일교(一敎一校: 한 교회에 학교 하나)라는 말도 생겨날 정도였는데 원장교회도 1909년에 합성(合成)학교를 세워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3․1만세운동 당시에 가장 치열했고 또 희생자가 많이 발생했던 시위가 원장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벌어졌다.
원장교회에서 가까운 반석교회에 조진탁(趙振鐸) 장로가 있었다.
반석학교를 설립해서 운영하는 분인데 이 분이 일이 있어 평양에 갔다가 평양만세시위에 참가하게 되었다.
조진탁 장로는 원장에서도 만세시위를 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품고 돌아와서 원장교회 장로들과 의논하고, 이들은 인근에 있는 반석(盤石)교회, 산수(山水)교회, 사천(沙川)교회에 연락해서 네 교회가 힘을 합해 시위를 하게 되었다.
3월 4일 오전 10시에 원장교회에서 운영하는 합성학교 교정에 군중이 모였는데 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은 기도, 독립선언서, 독립선포연설 등의 순서를 마치고 시장터로 나가 만세를 불렀다. 규모가 아주 큰 만세시위를 벌인 것이다.
이들은 사천헌병대에 갇혀 있는 동지들을 구출하기 위해 행진했는데 헌병과 헌병보조원들의 사격으로 여러 명이 죽고 다쳤다.
이에 흥분한 군중에 의해 일본헌병 한 명과 보조원 세 명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일본 헌병의 부인이 군중들에게 잡혔는데 사천교회 송현근(宋賢根)목사와 조진탁 장로가 군중들을 만류해서 이 일본여인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여인이 강서로 도망가서 헌병대로에 이 사태를 알렸고, 이 보고를 받은 평양헌병대에서는 5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원장과 사천의 기독교인 400여 명을 체포했다.
일본 당국은 이 사건을 ‘사천폭동사건’이라고 부르면서 엄중하게 취급했다.
이 사건으로 평양에서 재판을 받은 사람이 49명인데 일심에서 사형언도를 받은 사람이 19명
이라는 사실 하나만을 보아도 일본이 이 사건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잘 알 수 있게 된다.

                        ▣ 조진탁 장로 ▣

원장만세운동에 앞장섰던 조진탁 장로도 사형을 당했다.
조 장로는 만세시위 도중에 총탄을 맞아 부상을 당했다.
조 장로는 여러 곳으로 피신하면서 상처를 치료하다가 원산에서 체포당했다.
조 장로가 원산으로 간 것은 러시아로 탈출하기 위해서였다.
조 장로는 평양으로 끌려와서 평양형무소에 갇혔는데 이 때 독립운동을 하던 장남이 체포되어 진남포형무소에 갇혔다.
조진탁 장로는 1922년 10월 18일에 사형을 당했다.

사망한 교인들의 장례식은 3월 6일에 교회에서 있었는데 장례식이 끝난 다음에 만세 시위가 또 벌어졌다.
우리는 제암리교회 사건을 잘 알고 있는데 원장교회 사건과 제암리교회 사건을 3․1 만세운동 당시 2대 수난사건으로 꼽기도 한다.

▣ 끝이 좋지 않았던 목사 ▣

원장교회 담임자에 대해서는 3․1 만세운동 당시 심익현(沈益鉉) 목사가 담임하고 있었다는 것 외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심익현 목사는 평양장로회신학교 7회(1914년) 졸업생인데 이 만세운동 때문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런데 심익현 목사는 끝이 좋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친일활동을 하면서 신사참배에 앞장섰고, 해방 후에는 북조선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해서 북한당국에 적극 협력했다.
당시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의 중심인물들 가운데는 이렇게 친일경력을 가진 분들이 여럿 있었다.

원장교회 출신으로 명신홍(明信弘) 목사가 있다.
명 목사는 뛰어난 목회자이며 목회행정가로 예장 통합과 합동이 분열하기 이전인 1954년에 장로교 총회장을 지냈다.
명 목사는 신학교육에도 많은 힘을 썼는데 총신대 학장을 지내시도 했다.

원장교회의 주소는 평안남도  대동군 김제면(金祭面) 원장리 403의 1호였다.
원장리는 교통의 요지였다.
역마(驛馬)들의 대기소와 숙박소가 있고, 큰 장이 서는 곳이기 때문에 원장리라고 했는데 대동읍의 중심부를 원장거리라고도 했고, 읍거리라고도 했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평양으로 가는 도로, 강서군으로 가는 도로, 평원군으로 가는 도로, 증산군으로 가는 도로가 다섯 갈래로 뻗어 있다.
이곳의 현재 행정구역은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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