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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와 호서대학 대학원에서 신학을, 중앙대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 철학박사(Ph. D. 북한교회사 전공) 극동방송 근무, 성세감리교회와 목양감리교회 담임. 호서대 인문대학 겸임교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객원교수 역임. 현재 북한교회연구원(NCRC) 원장 한국기독교통일포럼 상임대표 외. 저서 <평화통일과 북한복음화> 외 다수

  제목 : (0098) 연화동(蓮花洞)교회(평남 평양)


                                            연화동교회
                                
                                  -장대현교회의 ‘손자 교회’-
                     (장대현교회에서 세운 남문밖교회가 설립한 교회)

「1938년 장로교주소록」에는 연화동교회의 주소가 일본식 행정구역인 ‘평양부 팔천대정(八千代町) 40번지’로 적혀 있는데 그곳의 원래 이름은 연화동이다.
연화동은 연꽃이 많이 피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서 지금 평양의 중구역에 속해 있는데 북한에서는 ‘련화동’이라고 적는다.
련화동은  1967년에 련화1동과 련화2동으로 나누어졌다.
북한의 당창건사적관이나 평양의학대학 부근에 연화동교회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날로 배가된 교회▣

연화동교회는 1911년 봄에 평양남문밖〔南門外〕교회에 의해 설립되었다(남문밖교회에 대해서는 61번 참고).
남문밖교회는 평양에 제일 먼저 세워진 교회인 장대현교회에서 최초로 세운 교회인데 평양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교회라고 해서 ‘제2교회’라는 이름도 갖고 있다.
연화동교회는 장대현교회에서 세운 교회에서 설립한 교회이니까 장대현교회의 ‘손자 교회’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연화동교회가 세워질 때 교인은 30명 내지 40명이었고, 집사가 네 분이었다.
교인이 계속 증가해서, 설립 이듬해인 1912년에 교인들이 힘써 헌금해서 스물네 칸 규모의 예배당을 건축했다.

연화동교회는 1918년에 의성제(義成齊)라는 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처음에는 학생이 여덟 명이었는데 몇 해 뒤에 백여 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연화동교회는 계속 부흥해서 1920년에는 교인이 500여 명, 1921년에는 600여 명에 이르렀다.
1921년에는 예배당을 증축했고, 목사 사택을 신축했다.

연화동교회 청년전도회에서는 양각도(羊角島)를 전도구역으로 정하고 열심히 전도해서 50명 내지 60명의 교인을 얻게 되었다.

          
                     ▣처음에는 필립스 선교사, 1920년대에는 김우석 목사▣

교회가 설립될 당시에는 필립스(C. L. Phillips, 弼立甫) 선교사가 담임했다.
필립스 선교사는 1910년에 한국에 와서 일제강점기 말기에 강제추방 당할 때까지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남도 지역에서 일했다.
연화동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에 그 보다 한 해 먼저 한국에 와서 일하고 있던 플럼머(F. Plummer)이라는 여선교사와 결혼했다.
필립스 선교사는 숭실대학교와 평양성경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 분은 일제강점기 말기에 강제추방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해방 뒤에 다시 한국에 와서 집회를 인도하고 조선신학원(현재의 한신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은퇴했다.

필립스 선교사가 연화동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황준국(黃濬國)이라는 신학생이 조사로 필립스 선교사를 도왔다.
황준국 조사는 1913년에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연화동교회를 떠났다.
연화동교회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1913년에 조사 황준국은 사면하고 순안(順安) 한상호(韓尙昊)를 조사로 청빙하다”는 기록이 나온다.
황준극 목사는 평양을 떠나 청주읍교회에서 목회하다가 다시 평안남도로 와서 안주 지역에서 목회했다.

이어 연화동교회의 1915년 1월의 기록을 보면 “조사 한상호는 사면하고 평양성 내 주공삼이 임시목사로 시무하다”라고 되어 있다.
주공삼(朱孔三) 목사의 이름은 주자(朱子)․공자(孔子), 그리고 자기, 이런 뜻으로 지어진 것이다. 그는 형제 문인인 주요한(朱耀翰)․주요섭(朱要燮)의 아버지이다.
주 목사는 남문밖교회 이일영(李一永)목사가 3․1 운동을 지도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있을 때와 그리고 석방된 후에 몸이 아파 1년간 휴양생활을 할 때 남문밖교회를 담임했던 분이다.
주공삼 목사는 1917년 6월에 연화동교회를 떠났는데 그 뒤에 남문밖교회에서 수고한 것이다.

1921년에는 김우석(金禹錫) 목사가 연화동교회에 부임했다.
김우석 목사는 장현(長峴)교회 장로였는데 1918년 2월에 연화동교회 조사로 청빙을 받았다.
연화동교회의 기록을 보면 김우석 조사가 열심히 일해서 교회가 부흥했다는 대목이 있다.
김우석 조사는 평양지역 3․1만세운동 때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6, 7개월 복역하였다.
김우석 조사는  1920년 12월에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다음 해 1월에 연화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김 목사가 담임하고 있을 때인 1924년 연화동교회의 통계를 보면 장년 교인 500여 명, 남며유년주일학교 생도 삼백 여 명, 장로 여섯 분, 장립집사 여섯 분, 서리집사  일곱 분, 부인집사 일곱 분, 남녀권찰 마흔 분, 남녀 장년주일학교 교사 예순두 분,남녀 유년주일학교 교사 예순여섯 분이었다.


                                               ▣불행한 목사▣

1930년대 후반에는 최지화(崔志化)목사가 연화동교회를 담임했다.
최지화 목사는 참 불행했던 분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분이다.
이 분은 안주 출신으로 안주에서 목회하면서 안주노회장을 여러 차례 역임했다.
그 다음에 평양으로 옮겨, 연화동교회를 담임했는데 이 때 평양노회장을 맡았다.
이 때는 일본 당국의 신사참배 강요가 극성을 떨던 때였다.
평양노회는 신사참배에 끝까지 반대하는 주기철 목사에 대한 파면을 결의했는데 이런 일들이 최지화 목사가 평양노회장을 하고 있을 때 일어났다.
1941년에는 제30대 총회장에 당선되었는데  어려울 때 총회장을 하면서 교회가 일제에 협력하는 일에 앞장을 섰다.

최지화 목사는 해방 후  독립운동에 대한 공로로 한국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는데 이같은 친일행각이 문제되어 2010년에 다른 열여덟 명과 함께 서훈이 취소되는 일을 겪었다.

최지화 목사는 해방 뒤에는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로 일했는데 6․26 때 공산정권에 의해 납치되어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 6.25 전쟁 중에 교회 폐쇄를 결의하다 ▣

해방 루에는 김윤찬(金允燦) 목사가 부임했다가 월남했고, 1년의 공백을 거쳐 1949년 4월에 김세진(金世鎭) 목사가 부임했다.
김세진 목사는 평북 용천 출신으로, 신성학교와 연희전문(현 연세대)를 거쳐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한 분이다.
신학교에 다니면서 중국 동북지역 안동(安東: 현재의 丹東)의 중앙교회를 담임하여 십여 년 간 목회했다.
1935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해방 뒤에 고향인 용천으로 돌아와 용암포교회를 담임했다.

김세진 목사는 1949년에 연화동교회의 청빙을 받고 부임했는데 이 때는 공산정권의 박해가 날로 심해져서 목회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고 두 번째로 맞는 주일인 7월 9일 새벽에 어느 여자 교인이 몰래 찾아와서 "우리 남편이 정치보위부 간부인데 오늘 목사님를 체포할 계획이 있으니 빨리 피하시라고 전하라고 해서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하였다.
김 목사는 그 날 5, 6명의 신도들과 함께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긴급 당회를 열어 교회를 임시로 해체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니까 연화동교회는 1950년  7월 9일에 해체되어 아직까지 재건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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