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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와 호서대학 대학원에서 신학을, 중앙대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 철학박사(Ph. D. 북한교회사 전공) 극동방송 근무, 성세감리교회와 목양감리교회 담임. 호서대 인문대학 겸임교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객원교수 역임. 현재 북한교회연구원(NCRC) 원장 한국기독교통일포럼 상임대표 외. 저서 <평화통일과 북한복음화> 외 다수

  제목 : (0069) 문구(文區)교회 (황해도 평산군 소재)



  
                                               문구교회
                       -조봉환 목사 재판기록을 통해 잘 알려진 교회-


문구교회는 황해도 평산군(平山郡) 문무면(文武面) 문구리(文區里)에 있었다.
문구교회가 있었던 문구리는 문무면의 면 소재지로서, 평야지대이고 문구천이라는 냇물이 흐르는 곳이다.  
이곳은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지금은 황해북도 린산군(麟山郡) 린산읍이 되어 있다.
북한은 1952년에 평산군의 일부와 서흥군의 일부를 가지고 린산군을 새로 만들었다.

            
                       ▣ 미국립사료관(NARA)의 북한노획문서를 통해 잘 알려진 교회▣


해방 이전 문구교회에 대한 기록은 아주 빈약하다.
황해도 평산군 문무면 문구리에 있었고, 1940년대를 전후해서 평양장로회신학교 1916년 졸업생(제9회)인 양석진(梁錫鎭) 목사가 담임하고 있었다는 것이 전부이다.
문구교회는 대해서는 오히려 해방 이후에 있었던 일 하나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게 남아 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북한의 문서를 수집하기 위한 특수부대를 편성해서 북한지역에서 여러 가지 문서들을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
북한이 2차 대전 이후 소련의 영향을 받으면서 탄생한 최초의 국가이기 때문에 그런 과정을 밝혀내기 위해서 그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해서 수집된 북한의 문서가 160만 쪽에 이른다.
이 문서들은 ‘북한에서 노획한 문서’라는 이름으로 미국 워싱톤에 있는 국립사료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1977년부터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1980대 초에 사와 마사히코(澤正彦)라는 일본 목사가 그 문서들 가운데에서 교회와 관련 있는 기록들을 찾아내서 한국교회에 제공했다.
사와 마사히코 목사는 한국의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한국신학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는데 한국 여성과 결혼을 하였다.
이 분은 「남북한교회사론(南北韓敎會史論)」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은 남북한 교회의 역사를 공정한 눈으로 기록해서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1980년대 중반에 병으로 아쉽게 일찍 세상을 떠났다.

사와 마사히코 목사가 한국교회에 제공한 문서 가운데 문구교회에 대한 기록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해방 뒤에 문구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던 조봉환 목사가 반동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재판기록이다.

            
                            ▣ 조봉환 목사 ▣


조봉환 목사의 고향은  황해도 재령군 삼강면 청용리이다.
재령은 장로교가 특히 왕성했었던 곳이다.
재판기록에 1947년 당시에 34세라고 나와 있으니까 1912년이나 1913년 생인 것 같다.
재판기록의 한 곳에 조봉환 목사가 일본 동경에 있는 일치신학교를 졸업했다고 되어 있고, 어느 곳에는 동경신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고 되어 있는데,  일치신학교와 동경신학전문학교가 같은 학교인지, 다른 학교인지는 알 수가 없다.
사와 마사히코 목사님는 1930년대에 동경에 일치신학교가 있었고 한국인 학생들이 여러 명 재학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조 목사의 설교 가운데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이야기로 예화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신학교에 가기 전에는 초등학교의 교사를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또 설교 중에 나이 많은 사람들도 공부해야 한다고 하면서 “나도 나이가 많아서 공부를 했습니다.”고 한 것도 기록에 남아 있다.

재판기록을 보면 조봉환 목사는 먼저 서흥군 신막에서 목사 일을 했다고 되어 있다.
이 교회는 서흥군(瑞興郡) 화회면(禾回面) 신막리(新幕里)에 있었던 신막교회일 것이다.
그리고 해방 뒤인 1945년 12월에 문구교회에 부임했다.
1947년 당시에 어린 아들이 둘이 있었다.


조봉환 목사는 설교를 통해서 반동사상을 고취했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체포당했다.
조봉환 목사는 1947년 1월초에 평산군 문무면 물안리에 있는 인민학교, 남한으로 말하면 초등학교에 가서 전도강연을 하였는데, 공산정권은 이 설교와 1947년 3월 6일 경에 서흥군 내덕면(內德面) 석연리(石蓮里)에 있는 석연분교에서 한 설교를 문제 삼았다.
당시 북한 검찰의 기소장에는 “서흥군 내덕면 성용리 성용장로교회에 가서 설교했다”고 되어 있는데 성용장로교회라고는 있지 않았다.
서흥군에는 성용리라는 곳도 없었다. 북한 검찰관이 실수를 한 것이다.
조봉환 목사는 전도를 위해, 교회를 세우기 위해 이런 곳들을 방문해서 집회를 가진 것이다.


                     ▣ “조밥에 새우젓도 못 먹는 사람들이 많다….” ▣


해방 후 북한교회에서 행해진 설교의 원고는 그리 흔하지 않은데 .조봉환 목사의 재판기록에는 문제가 된 설교의 원고들이 첨부되어 있다.
그 내용은 한마디로 해서 복음적인 설교였다.
그런데 부분, 부분에 북한정권을 비판하는 대목들이 있었다.
설교 중에 “지금 조밥에 새우젓도 못 먹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이 나오는데,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그러면서도 술 먹고, 투전하고, 굿하고 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공산정권은 이  “지금 조밥에 새우젓도 못 먹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을 문제 삼았다.

또 “지금 학교가 방학을 한 것 같이 기차도 방학을 했습니다.”라는 대목도 문제가 되었다.
당시 북한에서는 기차가 제대로 다니지 못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밖에도 보안서원들을 비난한 것, 서울에 다녀오면 잡아가두는 것을 비난한 것, 현물세 제도를 비난한 것,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되었다.

해방 직후에는 북에서도 태극기와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되는 애국가를 사용했다. 그런데 애국가 가운데 “하느님이 보우하사”를 ‘하나님’ 대신에 ‘우리’ ‘인민’을 넣어서 부르게 했다고 한다.
조 목사는 원래대로 부르게 했다.

북한정권은 전도설교한다는 구실 밑에 북한의 시책이 옳지 못하니까 반대해야 한다고 하면서 반동사상을 선전했고, 그래서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는 죄목을 걸었다.


                      ▣ 주일선거에도 불참하다 ▣

조 목사는 공산정권에게 아주 밉게 보인 것을 알 수 있다.
공산정권은 1946년 11월 3일, 주일에 선거를 했는데 많은 목사들과 기독교인들은 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
조 목사 역시 이 선거를 거부했다.

조 목사는 1946년말에 남천인민보안서에 연행되어 도 보안부로 이송되었다가 훈계방면되었는데 1947년  3월 14일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그때 그런 종류의 발언을 했다고 해서 고초를 겪은 교회지도자가 조봉환 목사님 한 분뿐이 아닐 것이다.
수없이 많은데 조봉환 목사의 경우는 그 자료가 남아있어서 이렇게 알려지게 되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조봉환 목사의 재판기록은 ‘해방 직후 북한에는 이런 종류의 사건이 많았습니다.’ 하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물이라고 할 수 있다.


                 ▣ 해방 후 북한교회, 한 때는 크게 부흥해 ▣

조봉환 목사의 설교 원고 중에는 “신천(信川)교회는 천5백여 명이 매주일 회집되고 평북, 평남 각 지방에서도 부흥되고 있습니다.” “전번 크리스마스 때는 평북 선천(宣川)에서만 축하한 사람이 6천명 가량이나 되었다고 합니다.“라는  대목도 있다.
이것은 해방 이후 북한의 교회가 한 때는 크게 부흥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여기의 신천교회는 신천서부교회를 가리키는 것이 확실한데, 황해도 신천은 기독교가 대단히 왕성하던 곳이었다.
잘 알려진 부흥사 김익두(金益斗) 목사가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김익두 목사가 신천교회를 세웠는데 1933년에 신천동부교회가 분립해 나감에 따라 신천교회는 신천서부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신천서부교회는 해방 이후 공산당의 박해 가운데에서도 조봉환 목사님의 설교에 나오는 것과 같이 상당한 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6․25 전쟁 중에 후퇴하던 인민군에 의해 김익두 목사와 장로, 집사 여러분이 피살당하고 교회는 문을 닫았다.


재판은 평산군 인민재판소에서 진행되었는데 5월 26일에 언도공판이 있었다.
검사는 5년을 구형했고, 판사는 4년을 언도했다.
조봉환 목사는 이에 불복해서 황해도 재판소에 상소했으나 기각되었다.
그리고 조봉환 목사의 소식은 끊어졌다.

조봉환 목사의 재판기록은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에서 펴낸 「한국민족운동과 민족문제」와 「한국민족운동의 역사와 미래」에도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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