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쯤 전,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습니다. 요즘은 고속버스를 타고 두어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이 서울이어서, 조금만 바지런히 움직이면 서울에 가서 하루 종일 볼 일을 실컷 보고 돌아 올 정도로 세상이 좋아졌지만, 그 때만해도, 정한 시간에 단 한 번도 오지 않고 적어도 두세 시간씩은 연착을 하는 서울행 완행 열차를 아홉 시간 남짓 타야 겨우 겨우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서울이었습니다. 그 즈음 서울에 못 가본 마을 어른들 사이에서는 “남대문 문턱이 대추나무 문턱”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입씨름도 아주 흔했습니다.
그런 꿈같은 시절에 코흘리개 어린것들이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으니 그 설렘과 경외심이 오죽했겠습니까? 난생 처음 타 본 기차, 뿌연 어둠을 뚫고 밤새 서울을 향해 지꺼덕 제꺼덕 끝없이 달리는 열차 속에서, 오줌이 마려워 화장실에 갔으나 그 잘난 무섬증 때문에 볼 일을 못 보자, 담임선생님께서 승강대에 매달리듯 서 있는 제 허리춤을 단단히 붙잡아 주셨지만 결국 실컷 애만 쓰다 마침내 그만 두는 촌극을 연출한 끝에 간신히 도착한 서울 역, 교과서 사진 속에서만 보던 남대문 그리고 서울 시내를 부지런히 오가는 신기한 전차, 숨가쁘게 움직이는 시내버스와 안내양 누나들의 당찬 몸짓, 난생 처음 들어가 본 남대문 근처 봉황여관 내부의 낯선 분위기, 일찍 서울에 올라가셔서 많이 힘들게 사시면서도 큰조카가 서울로 수학여행 왔다는 말을 듣고 숙소까지 찾아오신 작은아버님께서 담임선생님의 양해를 구한 후 데리고 나가 남대문 뒷골목 어느 중국집에서 사주시던 따끈하고 푸짐한 중국식 만두의 맛, 남산공원 야외음악당과 공군군악대의 우렁찬 연주, 창경궁과 비원의 고풍스런 분위기......
참, 수학여행 둘째 날, 해방 후 중앙청 청사로 쓰고 있던 일제시대 동양척식회사의 건물, 곧 지금의 국립미술관 건물을 견학하던 날 생긴 황당한 일도 생각납니다. 연일 신기한 서울 구경에 반쯤 넋이 나간 우리들을 중앙청 앞마당에 세워놓고, 인솔하신 선생님들께서 무언가를 열심히 의논하고 계셨는데, 알고 보니 중앙청 청사 입구 현관에 깔려 있는 붉은 색 카펫트 위를 지나갈 때, 아이들의 신발을 벗겨야 하느냐 그냥 들어가야 하느냐를 놓고 긴급회의를 하신 것이었습니다. 한동안 여러 의견이 오가다가, 어느 선생님의, “일단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가 그냥 신으라는 말을 듣는 것이 그래도 나으니 일단 벗겨서 들어가자”는 제안이 받아들여져서 우리들은 양손에 신발 한 짝씩을 들고 아주 조심스런 도둑고양이 발걸음으로 중앙청 현관을 걸어 들어갔습니다만, 한참 지난 뒤에 그곳 수위로 일하시는 아저씨들의 “그냥 신을 신고 다니는 곳”이라는 황당한 설명을 듣고서야 다시 신을 신긴 했지만, 촌뜨기들이 그 비싼 카페트 위를 신 신고 걷는 송구스러움에 중앙청을 다 빠져 나오기까지 얼마나 발걸음이 배배 꼬이던지요.
40년 해묵은 저의 어설픈 추억거리가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무슨 전설처럼 느껴질 만큼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생활도 많이 편리해 졌습니다. 하지만, 과학과 문명이 발달하는 만큼 인간성이나 인간의 도덕성이 함께 발전하는 것만은 아닌 듯하여, 빛 바랜 흑백사진 같은 제 어린 시절의 그 순박한 추억은 날이 갈수록 더 또렷해지기만 하는 것을 정말 어쩌지 못하겠습니다. (2004. 11. 1.)
* CBS 라디오 에세이(2004. 11. 1. 밤 11:55 방송) 원고
* 이광우 목사의 CBS 라디오 에세이 : 매주 월요일 밤 11:55, FM 103.7 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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