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시외에 사시는 교우댁 심방을 마치고 가슴 벅찬 황금 들녘의 감동에 젖어 전주 시내로 접어들어 오다가, 어느 초등학교의 비좁은 운동장에서 시끌짝한 함성 속에 가을 운동회가 열리는 모습을 곁눈질로 잠시 훔쳐보며, 아주 잠깐동안이었지만 어린 시절 대운동회의 감동에 젖을 수 있었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 그래도 정직한 계절 덕분에 그렁저렁 풍요로운 가을걷이가 끝나 가는 무렵에 열리던 시골 초등학교의 대운동회는 그야말로 온 마을의 큰 잔치였습니다. 대운동회 날이 잡히면 온 동네 사람들이 한껏 설레는 마음으로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제발 그 날만은 비가 오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습니다. 학생들은, 운동회날 한 2주쯤 전부터는 아예 오후 수업을 때려 치고 운동회 연습, 총연습에 골몰했습니다. 대운동회의 꽃은 뭐니뭐니해도 폐막식 직전의 청백계주였습니다. 평소 공부의 '공'자만 나와도 닭살 돋던 청개구리들이 전교생 앞에서 한껏 으스대며 정말 멋진 날쌘돌이 영웅이 되는 날이 바로 대운동회 날이었습니다.
제가 아직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어른들을 따라 그런 대운동회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점심 후 오후 시간에 '감 주워가기' 깜짝 행사가 있었습니다. 운동장 한 가운데에 햇감을 네댓 무더기 수북수북 쌓아 두고 총성이 울리면 아이들이 와아 달려나가 그 감을 마음껏 주워 가도록 하는 행사였는데, 함께 간 어른들이 장난삼아 뒤늦게 억지로 등 떠미는 바람에 몹시 숫기 없는 어린 저도 운동장 감 무더기를 향해 딴엔 열심히 내달렸습니다만, 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다른 형 누나들이 감을 다 주워가 버리고 난 뒤였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아차' 싶어 내심 당황하는데 때마침 운동장 가운데서 치마폭을 움켜쥐고 일어서려 애쓰는 저보다 몇 살 위로 보이는 여자아이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이 여자아이는 욕심사납게 자기의 검은 치마폭을 아예 땅바닥에 깔아놓고 치마폭 가득 감을 쓸어 담아 놓고 있었는데 어찌나 감을 많이 담았는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한 채 혼자 버둥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다짜고짜 그 누나의 치마폭 위에 있는 감을 두어 개 용감하게 집어 들고 돌아서려는데 이 여자아이가 제 손목을 쥐고 놓아주질 않습니다. 운동장 한 복판에서 느닷없는 멱 씨름이 벌어져, 그 여자 애는 제 손목을 틀어쥐고 저는 마침내 그 여자 애의 머리채를 손에 말아 쥐고 둘이 꼼짝도 못한 채 씩씩대며 한참을 그리 서 있었습니다. 콩알만한 어린것들이 운동장 한 가운데서 그런 모습을 연출하자 운동회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배꼽을 쥐고 나뒹굴며 엄청난 천둥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 후로 한 동안, 엄마 아빠를 따라 길에 나가면 마주치는 이웃동네 어른들이 너털웃음과 함께 저를 가리키며 제 어르신들께 "야가 가여?"라고 물으시곤 했습니다.
산업화·도시화·핵가족화의 물결 속에 이웃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며, 일년에 한두 번 하는 운동회조차, 도심의 비좁은 운동장에서, 오전에는 하급학년이, 오후에는 상급학년이 교대로 운동회를 하는 요즘 아이들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할지 무척 고민입니다. 누군가의 아이를 턱으로 가리키며 "야가 가여?"라고 물을 수 있는 아이 한둘쯤 제 주변에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마는…… (2004. 10. 18.)
### "야가 가여?"(전라도 사투리로 "이 아이가 그 아이인가?"라는 뜻)
* CBS 라디오 에세이(2004. 10. 18. 밤 11:55 방송) 원고
* 이광우 목사의 CBS 라디오 에세이 : 매주 월요일 밤 11:55, FM 103.7 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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