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연해주에는 ‘고려인’으로 불리는 우리 동포들이 꽤 많이 살고 있습니다. 1860년부터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이주하기 시작한 고려인들은 일본의 스파이 혹은 잠재적 스파이로 몰려 1937년 스탈린에 의해, 매서운 시베리아 삭풍 속에 모진 추위와 굶주림에 떨면서 화물열차, 가축열차에 실려 한 달 여만에 6천 km 이상 떨어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의 중앙아시아에 강제 이주됩니다. 그 때 강제 이주된 고려인은 무려 18만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1953년 스탈린이 죽은 후 고려인에 대한 차별대우가 다소 누그러지고, 한국인 특유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끈질기게 노력한 끝에 중앙아시아 지역에서의 정착생활에 성공한 고려인들은, 역시 한국인 특유의 자녀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뼈마디 아프게 번 돈으로 자녀들을 열심히 가르침으로써 구 소련 연방 체제 아래서 나름대로 그럴 듯한 사회적인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만, 1991년, 소연방 산하 15개 연방국들이 각 민족공화국으로 독립하면서 소연방 체제가 무너진 다음, 민족고유의 언어를 쓰는 정책과 소수민족에 대한 회교도 자민족 보호주의가 신흥독립국에 확산되면서, 구 소연방 체제 속에서 그럭저럭 잘 뿌리내리고 살던 고려인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무서운 핍박을 가해 옴에 따라 또 다시 중앙아시아 지역을 탈출하여 60여 년 전에 떠났던 연해주 지역으로 결국 다시 쫓겨오게 되었습니다.
겨울이면 영하 30-40도를 오르내리는 극지방의 혹한 속에서, 쓰레기장이나 다름없는 구 소련군의 폐 막사에서, 헌 담요로 창을 가리고 백열등에 망을 씌운 난방기구를 이불 속에 넣어 두고 온 가족이 웅크리고 앉아 긴 겨울밤을 지새는 처절한 고통 속에서 버둥거리던 고려인들은 남북나눔운동본부와 남서울은혜교회(담임 홍정길 목사)를 비롯한 남한의 뜻 있는 교회들의 도움 속에 겨우 겨우 자활의 터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고려인 루직도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 루직은, 삭막한 연해주에 또 다시 내동댕이쳐진 깊은 한을 삭이며, 지난 9년 동안 피눈물나는 노력을 한 끝에, 미하일로브까의 고려인 정착촌에 작은 집을 하나 장만하고, 9년 전 허둥지둥 도망쳐 나올 때 다섯 살이었던 아들을 데려오기 위해 9년 동안 피나게 모은 2천 달러를 가지고 우크라이나로 들어가서 무사히 아들을 데려 왔고, 지금은 비록 아직 가난하기 그지없는 삶이지만 열심히 농사지으며 9년 만에 되찾아 온 아들과 함께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1999년, 심방 나가던 길에 음주운전 차량에 받히는 교통사고를 당해 몇 주간 병원에 입원하고 있던 어느 깊은 밤, 갑자기 아내와 아이들을 보고 싶은 마음을 어쩌지 못해 환자복을 입은 채로 병원 1층 로비 어둑한 소파에 혼자 웅크리고 앉아 수족관 속의 무던히 행복해 보이던 물고기 가족을 밤새 멍하니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단 며칠 간 떨어져 지내는 것도 그토록 큰 아픔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고려인 루직이 그 긴 세월 겪었을 혹독한 그리움의 깊이를 저는 도무지 짐작도 못하겠습니다. 우리 조국의 평화적인 통일이 속히 이루어져서 루직을 비롯한 우리 동포들이 이제는 제법 잘 살게된 조국의 따스한 품에 편히 안기는 날이 어서 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2004. 10. 11.)
* CBS 라디오 에세이(2004. 10. 11. 밤 11:55 방송) 원고
* 이광우 목사의 CBS 라디오 에세이 : 매주 월요일 밤 11:55, FM 103.7 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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