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소리공연예술인 판소리. 그 가운데 중요한 유파의 하나인 '서편제'는 섬진강 서쪽인 광주·나주·보성 등지에서 많이 불렸던 소리입니다. 웅장하고 박력 있는 '동편제' 소리에 비해 서편소리는, 서리 서리 맺힌 한(恨)을 풀어내는 기교와 소리 그늘의 맛이 일품입니다. 서양음악의 단조에 해당되는 계면조 소리를 많이 쓰기 때문에 서편제는 대체로 정교하며 감칠맛이 있습니다.
서편제 소리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영화감독 임권택씨가 1993년에 만든 '서편제'라는 판소리 영화를 통해 좀더 친숙하게 다가온 듯합니다. 극중 주인공 유봉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 낸 김명곤씨나, 중학교 1학년 때 전주대사습놀이 학생부 장원 상을 받을 정도로 소리 재질이 뛰어난 극중 송화 역의 오정해 양, 서편제라는 영화를 찍기 위해 부랴부랴 소리북을 배워 주인공 동호 역을 무난히 소화해 낸 배우 김규철씨의 빛나는 소질과, 한국적인 소재를 특유의 예리한 감각으로 화면에 담아낼 줄 아는 임권택 감독의 능숙한 연출 솜씨가 어우러지면서 영화 서편제는 한동안 국내 극장가를 술렁이게 만들었습니다.
홀아비 유봉과 아들 동호 그리고 의붓딸 송화가 소리 품을 팔며 근근히 연명하는 중에, 아비 유봉이 아들 동호를 고수로, 의붓딸 송화를 소리꾼으로 만들어 자신이 못다 이룬 '득음(得音)의 소리꾼'을 만들기 위해 무던히 애썼지만, 결국 강압적인 분위기에 지친 아들 동호가 아버지와 싸운 뒤 가출하고, 동호의 가출로 인해 송화까지도 소리를 그만두려 하자, 유봉이 극약을 먹여 송화를 맹인으로 만들어서까지 소리꾼으로 만들고자 애쓰다 쓸쓸히 세상을 떠납니다. 퍽 오랜 세월이 흐른 어느 겨울날, 남도의 어느 시골 주막에서 눈먼 송화가, 누이를 찾아 수소문하던 의붓남동생 동호를 만나 동생의 북가락에 얹어 한 서린 소리 마당을 밤새워 펼칩니다. 북가락을 접하는 순간, 자기 동생임을 단번에 알아챈 송화는 한 서린 피눈물로 흐느끼며 소리를 합니다. 이렇듯 애타는 내용의 영화 서편제는 그 줄거리 자체가 서편제 소리에 제격입니다.
영화 속에서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듯이, 소리꾼과 고수의 관계는 종종 부부관계에 비유될 만큼 긴밀합니다. 실제로, 북가락이 화려한 고수들은 곳곳에 퍽 많지만 소리꾼들이 정말 마음에 들어하는 고수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소리와 북이 밀어주고 당겨주면서, 서로의 마음과 마음 영혼과 영혼이 한데 어우러져 맺힌 한을 푸는 마당이 판소리이기에, 어쩌다 자기 마음에 맞는 고수를 만난 소리꾼은 무한한 생의 희열을 느낍니다. 대개 수준급 소리꾼들은 북가락이 화려한 고수보다는 소리결과 맥에 맞춰 북을 정갈하게 다루는 고수들을 더 좋아합니다.
서양음악에서도, 독창과 합창은 전혀 다른 장르입니다. 세계적인 성악가들을 다 모아 놓는다고 해서 꼭 좋은 합창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적인 축구선수들을 모아놓은 초호화군단의 프로축구팀이 항상 이기는 것이 아니듯이, 독창 실력이 뛰어난 성악가는 자칫 합창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화려한 명함을 지녀 목소리 큰 사람들이 많이 모인 집단이 반드시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만은 아닌 것, 우리네 세상살이의 또 다른 묘미인 것 같습니다. (2004. 9. 20)
* CBS 라디오 에세이(2004. 9. 20. 밤 11:55 방송) 원고
* 이광우 목사의 CBS 라디오 에세이 : 매주 월요일 밤 11:55, FM 103.7 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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