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 년 전, 한국전쟁의 상처가 나라 안 곳곳에 남아 있던 저의 어린 시절은 늘 춥고 배고팠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들으면 결코 현실 이야기로는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사는 꼴이 너나없이 으지짠하고 고단하기만 했습니다. 한결같이 생존하기 바빠 사람다운 생활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어려운 시대여서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짊어진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몹시 힘겨워하는 어른들 밑에서 엉덩그르한 밤톨처럼 겨우 겨우 자라는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몹시 힘에 부치는 세월을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 시절에 한 달에 한 번 꼴로 돌아오는 조상님들의 제삿날이나 일년에 한두 번 가슴 뻑적지근하게 다가오는 대명절이 어린 저희들에게는 늘 골똘히 기다려지는 축제였습니다. 그런 날은 정말 모처럼 쌀밥과 고깃국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고, 비록 후줄근한 모양새일 망정 새 옷을 얻어 입거나 새 양말 또는 새 고무신을 신어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학교 2학년 때로 기억되는데, 조상님의 제사였던 어느 날 수업시간에, 그 날 저녁의 제사 축제(?)를 생각하며 괜히 기분이 좋아진 나머지 저도 모르게 혼자 콧노래를 부르다, 지나친 오해로 저를 몹시 괘씸하게 여기시는 선생님으로부터 얼굴이 얼얼할 정도로 손찌검을 당했는데, 그러면서도 선생님의 매서운 손찌검이 그리 혹독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제 속마음은 들떠 있었던 씁쓸한 기억도 있습니다. 해마다 한두 번씩 어김없이 찾아오는 명절이 가까워 오면 어른들은 명절 가까운 장날 면소재지나 읍내에 나가 자식들 입힐 옷, 양말이며 신발들을 사오시는데 어머니는 늘 한 2-3년 뒤 훌쩍 자랄 자식들을 생각하시며 몇 치수 위의 옷이나 신발을 사오셨고, 이 집 저 집 가릴 것 없이 어르신들의 마음은 한결같아서, 명절에 새 옷을 입고 고샅에 나온 아이들은 너나없이 소매나 바지를 두세 번씩 딸딸 접어 올린 모습이었습니다. 그러고도 옷이 영 헐렁하면 하루 종일 바지춤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돌아 다녀야 했는데, 그래도 우리 어린것들의 발걸음은 하나같이 밝고 가벼웠습니다. 한동안, 자동차 타이어 고무로 만들어서 질기기가 한이 없다는 타이어표 검정고무신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는데, 말 그대로 얼마나 질긴지 아무리 신어도 신발이 좀체 닳지 않자 새 신을 신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몇몇 친구들은 학교 담벼락에 고무신을 벅벅 문질러 슬그머니 구멍을 낸 다음 기어이 새 신을 얻어 신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명절이, 철들면서 언제부터인지 심드렁해지는가 싶더니 이젠 아예 버겁게 느껴지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우리 삶의 형편이 많이 좋아진 탓이겠지만, 생활수준이 높아질수록 세상이 나날이 각박해 지고, 참 소박하고 맑았던 동심의 설렘마저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아 은근히 속상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속담처럼, 지금도, 뜻밖의 재난과 질병과 가난으로 어쩌다 한두 번 돌아오는 큰 명절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슬프고 외롭고 고통스런 이들에게도 한가위의 풍성함이 한가위 보름달처럼 두렷하기를 바랍니다. (2005. 9. 8.)
이광우 목사의 CBS '5분 메시지' : 매주 목요일 오후 1:55, FM 103.7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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