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출신 마르틴 하이데거는 유럽 대륙 문화계에 큰 영향을 끼친 20세기를 대표하는 독창적인 실존철학자입니다.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가톨릭 신학과 중세 기독교 철학을 공부한 하이데거는 다양하게 쓰이는 ‘있다’라는 존재동사의 바탕에 하나의 기본적인 의미가 깔려 있을 가능성을 평생동안 연구했습니다. 늘그막의 하이데거가 불안/사유/망각/호기심/염려/공포/인간/공공성/타자지향성 등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인 이유도 바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방식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인간 실존에 대한 오랜 연구의 결론으로 그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인간 존재를 규명하는 과정의 핵심에 ‘언어’가 존재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결코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의 이 말을, 좀 쉽게 “언어는 사람이다”라는 말로 바꿀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선물인 말과 글은 수많은 피조물 중에 오직 사람에게만 주어진 매우 소중한 문명의 도구입니다. 별로 말이 없이 조용히 지내기를 즐겨했던 청소년시절, 그런 저를 많이 답답해하시는 어르신들로부터 “구멍 속에 든 뱀이 몇 자인 줄 어찌 아느냐?”는 애정 어린 꾸지람을 가끔 들었는데 이 또한 “언어는 사람이다”라는 대 전제 위에서 하신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그 사람의 보이지 않는 마음은, 말과 글로 표현되기 전에는 도무지 알 수도 없고 함부로 짐작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이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언어상대성 원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컨대, 무수한 빛깔로 구성된 무지개를 우리가 흔히 빨/주/노/초/파/남/보의 일곱 가지 빛깔로 말하는 까닭은, 빛깔을 구별하여 표현할 수 있는 우리 말 ‘빛깔 언어’가 일곱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빛깔 언어가 셋밖에 없는 이들은 무지개의 색을 셋으로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동원할 수 있는 낱말의 숫자 곧 표현 능력에 따라 그 언어주체의 존재가 달리 인식된다는 것이 바로 ‘언어상대성원리’입니다. 그러기에 열 개의 실력 가운데 여덟 개를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스무 개의 실력을 갖고도 다섯 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낫다는 평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말이 아니더라도, 언어상대성원리에 따라 언어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에 “글과 말은 사람이다”라는 말은 분명히 맞습니다. 말이나 글과 그 사람의 됨됨이가 정반대로 나타나는 경우가 더러 있긴 하지만, 그럴싸한 논리의 거짓 글과 번지르르한 말을 통해 그 사람의 이중성이 또렷이 드러나기 때문에 “언어는 사람이다”라는 말은 그런 경우에도 여전히 옳습니다.
어쩌다보니 저도, 여러 사람 앞에서 말을 많이 하고 글 쓰는 일을 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남은 날 동안, ‘저의 말과 글 그리고 펴내는 책에 행여 추한 이중성이 드러나지나 않을까’ 조바심하지는 않을 만큼 소박하고 깨끗한 삶을 최선을 다해 살고 싶습니다.
(2005. 8. 11.)
이광우 목사의 CBS '5분 메시지' : 매주 목요일 오후 1:55, FM 103.7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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