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 짙어진 틈새마다 무리 져 피어있는 뒷산의 연초록 밤꽃을 한참동안 지켜보다가 갑자기 세상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 온갖 오염과 공해로 얼룩지고 죄에 찌든 세상도 이토록 아름답다면,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다 하셨던 태초의 세상은 또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상상해 보았습니다. 태초의 세상이 하나님 보시기에도 좋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거기에 ‘안식’과 ‘평화’가 넉넉히 깃들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범죄한 뒤로 인간은 영생을 누리지 못하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만 했고, 죽음이 왕 노릇 하는 세상에 평화는 없었습니다. 솔직히, 인간의 역사 속에 평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해타산에 따른 끼리끼리의 평화, 약자를 죽이고 무릎 꿇려서 얻는 힘 있는 자의 평화 곧 제국주의적 평화는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때 ‘로마제국의 평화(Pax Romana)’가 지구촌을 지배했다면 오늘은 ‘미국의 평화(Pax Americana)’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제국주의적인 평화는 약자의 피를 말리는 참혹한 전쟁으로 힘있는 자들만 누리는 평화이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모든 사람들과 자연을 아우르는 참 평화는 아닙니다.
인류역사의 가장 확실한 결론은 제국은 반드시 망한다는 것입니다. 제국이 망할 때마다 제국의 거짓 평화 또한 어김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런 뜻에서 아담이 하나님을 반역한 뒤로 평화가 단 한 순간도 없었다는 말이 지나친 것은 아닙니다. 공포와 두려움의 세상, 안식의 그림자도 찾아보기 힘든 세상에 예수님께서 참 평화의 왕으로 오셨지만, 세상은 그 분을 반겨하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참 평화에 목마른 인간들이 자신의 손으로 참 평화를 죽이는 모순을 범하고 만 것입니다. 참 평화를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것을 끝끝내 거부하는 세상을 보시며 예수님은 흐느껴 우셨습니다(눅 19:41-44). 마지막 숨이 지는 순간까지 예수님은, 하늘의 참 평화는 십자가를 지고 내가 죽어서 다른 이를 살리는 것임을 온몸으로 가르쳤습니다. 그 분의 평화는 나보다 작고 못난이들을 내 목숨을 바쳐 돌보고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또 다시 6월이 왔습니다. 25일은, 우리민족 현대사의 가장 아픈 기억인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 아픈 상처는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지구촌에 하나 뿐인 녹슨 분단상황으로 고스란히 남아 가뜩이나 안식 없는 우리를 끝없는 전쟁의 공포 속으로 또 다시 몰아넣고 있습니다. 6일은, 바로 그 고통과 아픔 속에 못다 이룬 꿈과 한을 안고 세상을 뜨신 이들을 추억하는 현충일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 우리가 희생하지 않고 누리는 평화는 다 거짓입니다. 우리 모두가, 내가 죽어서 너를 살리고자 할 때 비로소 참 평화와 안식이 우리 곁에 뿌리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참 평화는, 뒷산 가득한 초여름의 밤꽃향기처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의 편안하고 낙낙한 어울림이고 아우름이기 때문입니다(사 65:25). (2005. 6. 9.)
* 이광우 목사의 CBS '5분 메시지' : 매주 목요일 낮 13:55, FM 103.7 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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