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후유증이 고스란히 남아 있던 저의 유년시절은 늘 춥고 배고팠습니다. 저희 집만 춥고 배고픈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백성들이 다 그랬습니다. 손에 쇠갈고리를 달고 설쳐대는 무서운 상이군인들, 참으로 골치 아픈 각설이패, 넘쳐 나는 결핵환자들의 비쩍 말라 창백한 얼굴, 무리 지어 다니며 각설이패 못지 않게 소란스럽게 구는 나병환자들, 자운영밭 너머로 하늘을 시꺼멓게 덮는 까마귀 떼의 음산한 울음소리, 심한 굶주림과 영양실조와 황달 때문에 얼굴이 누렇게 뜬 채 온 몸이 뚱뚱 부어있는 사람들, 겨울이면 문풍지 사이로 숭숭 들어오는 외풍, 자고 나면 얼어붙어 있는 요강, 세수하고 방에 들어올라치면 고압전류처럼 쩍쩍 달라붙는 싸늘한 겨울날의 쇠문고리 등등이 세월이 흘러도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제 어린 시절의 아픈 이미지들입니다.
그렇게 너나없이 모두가 그야말로 가랑이 째지게 춥고 배고프기만 하던 시절, 소 한 마리쯤 갖고 있는 집은 그 동네에서 힘 좀 쓴다는 부잣집이고, 그저 중산층쯤 되는 이들의 집이라야 돼지 한두 마리가 있는 게 고작이었고, 가진 것 별로 없는 소시민들은 어찌어찌 집에서 부화시켜 기르는 닭 몇 마리를 신주단지 모시듯 정성껏 길러 힘겹게 자주 돌아오는 제삿날 제상에 올릴 제물로 사용하기도 하고, 좀 귀한 손님을 접대할 때 음식재료로 쓰기도 했습니다. “사위가 오면 씨암탉 잡아 준다”는 속담도 그래서 생겨났을 것입니다.
저희 집에도 마당 한쪽 귀퉁이 담벼락 밑에 작은 닭장이 하나 있었고 예수 믿기 전, 경주 이(李)가 집안의 장손으로서 제사를 자주 지내야 했던 아버님께서 제수용으로 쓰실 요량으로 닭 몇 마리를 기르고 계셨습니다. 어르신들 입장에서야 자주 돌아오는 제삿날이 늘 허리가 휠 만치 큰짐이었겠지만 어린 저희들에게는 제삿날이 곧 눈부신 축제의 날이기도 했습니다. 밀려오는 졸음을 잘 참고 한밤중까지 어찌어찌 버텨내기만 하면 제사가 끝난 후 음복(飮福)시간에 그 맛난 고깃국을 모처럼 맛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닭장이 문간에 있는 까닭에, 오며가며 틈틈이 닭장을 들여다 볼 기회가 많았는데, 그러던 어느 날 그 비좁은 닭장 속에서도 끊임없이 살벌한 힘겨루기가 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어린 마음으로도 참 슬펐던 기억이 있습니다. 좀 힘센 닭이 소위 왕따 당하는 어떤 닭의 꽁무니를 심심하면 한번씩 쪼아대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그 닭의 꽁무니에 상처가 나서 피가 비쳤습니다. 그러자 닭장 안의 모든 닭들이 모두 다 달려들어 심심하면 피가 흐르며 벌겋게 부어 있는 닭의 엉덩이 상처를 콕콕 쪼아대는 바람에 마침내 그 닭은 며칠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전자정보통신 체계가 정말 빠른 속도로 발전한 우리들의 사회. 전화로, E-메일로, 때로는 여러 인터넷 홈페이지와 블로그 속에서 순식간에 무한대로 증폭되며 마구 퍼져 가는 정보 때문에, 정말 소중한 한 사람의 인격과 자존감이 돌이킬 길이 전혀 없는 채로 너무 허망하고 무참하게 짓밟히는 모습을 자주 보면서, 하나님의 형상이자 만물의 청지기인 인간이 그만 닭으로 전락하여 우리들의 세상이 닭똥 냄새 무던히 구리던 그 비좁은 닭장이 되고 만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몹시 가슴 아플 때가 참 많습니다. (2005. 5. 16.)
* 이광우 목사의 CBS 라디오 에세이 : 매주 월요일 밤 11:55, FM 103.7 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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