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 필요한 곳을 찾아 다니지 않고,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겠습니다."

신학을 시작하면서 주님 앞에 이렇게 다짐하고 약속한 까닭에, 형편이 훨씬 나아보이는 교회들의 초청을 거절하고, 10년 전 전주열린문교회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모든 세상살이가 다 그렇겠지만, 목회사역 역시 사람을 만나는 기쁨, 정 들었던 이들과의 어쩔 수 없는 이별의 아픔 속에 세월의 수를 놓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은 10년 세월 속에, 이제는 이름조차 감감한 동역자들도 많고, 평생동역을 다짐하며 함께 고난의 물결을 여전히 함께 헤쳐나가는 동역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날마다 때마다 이른비와 늦은비의 은총 속에 동역자님들 한 분 한 분과의 소중한 만남을 허락하셨습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다 보니 전주열린문교회 사역이 어느듯 10년을 꼬박 채우게 되었습니다.

그 10년 세월동안 많은 만남이 있었지만, 목회자와 성도의 만남이 인위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확신 속에 "결코 다툼과 허영으로 사역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다짐대로, 아직까지 누구에게 "우리 교회로 오시라"는 말을 한 적 없고, 주일에 교회당을 기웃거리는 분들을 향해 "등록하시라"고 권한 적도 별로 없고, 무슨 말 못할 사정으로 오랜 고민과 기도 끝에 교회를 옮기고자 하는 분들에게 (그들이 이단집단으로 가거나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한) "떠나지 마시라"고 말해본 적도 없습니다. 자원하여 누군가가 등록하면 새벽마다 동역자를 위해 기도한 저의 기도에 주님께서 응답하신 것으로 알고 반갑게 영접하였으며, 혹 헤어지는 경우가 되면 하나님의 더 큰 뜻이 있어서 성도들의 발걸음을 주님이 주장하시는 것이리라는 믿음으로 인간적인 섭섭함을 억누르며 축복하며 보내드렸습니다. 돌아보면…… 목회사역은, 만남의 기쁨과 헤어짐의 아쉬움으로 엮여진 한 벌 뜨개옷과 같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떠나간 이들이 보고싶어질 때마다, 그들의 영육간 행복을 위해 기도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일도 없는 것이 바로 목회자인 것 같습니다.

처음 전주열린문교회 사역을 시작할 때, 저희 집 식구를 포함해서 8명이 전부였습니다. 대홍수 때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 있던 노아의 가족과 같은 숫자였지요. 10년이 지난 지금, 그 8명 가운데 저희 가족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남아계신 분이 바로 김옥순 권사님이십니다. 올해 나이 65세, 저희 어머님보다 세 살 아래지만 처음 만나던 날부터 그냥 제 어머니처럼 늘 편안하게 느껴지신 분입니다.

가진 것이 많은 분도 아니고, 많이 배우신 분도 아니고, 그렇다고 빼어난 미모를 갖추신 분도 아니고, 집안 배경이 남들 앞에 내세울 만큼 번듯한 것도 아니고, 교회에서 여러 사람 앞에 나서서 뭔가를 하시기 보다는 늘 수줍음을 잘 타시며 다른 사람들을 앞세우고 뒤에서 말없이 지켜 보며 격려하시기를 즐겨하시는 분…… 처음 만났을 때 50대 후반이셨던 권사님은 지난 10년 동안 그냥 그렇게 신출내기 목회자 곁에 말없이 서 계셨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이 권사님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처음 만났던 그 느낌 그대로 그냥 그 자리에 서 계십니다. 마치 고향마을 들머리, 수백년 수령의 느티나무 그늘처럼 말없이 사람을 평안케 하는 든든한 그림자로 그렇게 우리 공동체와 함께해 오셨습니다. 아무리 큰 고통과 아픔도 권사님의 얼굴을 한 번 보면 그냥 눈 녹듯 사라져 버릴 만큼의 넉넉함이 권사님에게는 늘 있었습니다.

교회사역 초기, 느닷없는 인간관계의 갈등 때문에 몹시 힘들어하다가 결국 평생동역을 다짐했던 N 장로님과 헤어지게 되었을 때 권사님은, N장로님 부인과의 50년 우정을 뒤로하고 만난 지 5년도 채 안된 젊은 목사 곁에 든든히 서서, 너무 허망하게 지쳐버린 풋내기 목회자에게 말없이 큰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돌아보면 그 때 그 순간이 제 사역에 아주 큰 위기였는데, 권사님같은 동역자님들의 성원과 격려로 그 어려움을 잘 이기고 오늘에 이른 것 같아 선한 동역자님들을 허락하신 우리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전라도 토박이로 살아오셨으면서도 권사님의 푸근한 성품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언뜻 충청도 사투리같은 느릿한 말투, 거기 배어 있는 인생의 깊은 경륜과 여유가 어설프기 그지없는 풋내기 목회자에게는 무엇보다도 큰 힘과 은혜가 되었습니다.

"지가 뭐 아는 것 있간디유? 암 것도 허는 것 읎이 그냥 예배당 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것이 항시 죄송헐 뿐이지유."

그러면서도 권사님은 늘 <거기 그 자리에> 평안의 그림자를 공동체에 드리우고 계셨습니다.

몇 년 전 어느 날, 난생 처음으로 저희 집에 전화를 걸어오신 권사님은 몹시 수줍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그, 목사님…… 으쩌케 히얄랑가 몰라서 생각 끝에 목사님을 귀찮게 허게 되었네유. 엊그저께 집에 가는 길에 껌정 지갑을 하나 주웠는디, 열어봉개 돈이 많이 들어 있고 카드도 몇 장 들어 있는디, 지 대신 목사님이 그냥 주인 조깨 찾아 주셨으면 좋것는디유. 그나저나 바쁘신 목사님 귀찮게 혀 드려서 정말 죄송혀유."

권사님의 부탁을 받고 지갑을 넘겨 받아보니 꽤 많은 액수의 현금과 신용카드, 몇 가지 신분증 등이 들어 있었습니다. 내용물로 보아 지갑을 잃은 분 입장에서는 참 난감해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수첩에 있는 몇 가지 기록을 참고하여 익산으로 군산으로 이 아파트 저 아파트 관리사무소로 꼬박 이틀 동안 수소문 한 끝에(시간과 전화비, 꽤 많이 들었지요.) 지갑 임자를 찾아 냈습니다. 얼마나 급했는지, 연락이 된 후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지갑 주인이 제가 사는 아파트 입구까지 한달음에 찾아 왔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서, 확인할 겸 그 사람에게 지갑 속에 있던 내용물을 물어보았더니 대답하는 내용으로 보아 지갑 임자가 틀림없어서 그것을 돌려 드렸습니다. 지갑 임자는 예수를 믿지 않는 분이었는데, 우리 권사님이 예수 믿는 분이기 때문에 이 지갑을 그대로 돌려 드리는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강조한 후 그 분을 돌려 보냈습니다. 그 일 후로 한동안 마치 제가 그렇게 착한 일을 한 듯이 가슴이 뿌듯하고 흐뭇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려운 교회 형편을 돕겠다고, 이러 저러한 힘든 일거리들을 찾아 일을 하시고, 힘들게 버신 돈 정성껏 모아 교회에 헌금하시면서 눈물을 글썽이며 하시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읎이 살다 봉게, 쪼깨라도 헌금 좀 허고잪어도 그것을 못 혀서 늘 맴이 아팠는디, 이렇게라도 교회를 위해 지가 헌금 쪼끔 허고낭게 을매나 좋은지 모르겠어유. 목사님, 지가 교회에 짐만 되야서 늘 죄송혀유……"

저는 이렇게 권사님을 위로했습니다.

"아닙니다. 권사님이 우리 교회에 계신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힘이 되는데요. 너무 그렇게 무리하지 마시고 그냥 권사님 몸 건강하게 오래 오래 저희 곁에 있어만 주시면 됩니다."

그런 권사님이, 아직은 젊다할 수 있는 60대 중반에 그만 암에 걸려 그 힘들고 어려운 항암치료를 하며 질병과 힘겹게 싸우고 있습니다. 얼마 전, 겨우 짬을 내 심방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고하고 위로하는데, 아들같은 목사의 말을 어쩌면 그리도 달게 잘 받아 주시는지…… '이런 분들만 계시면 목회사역에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겠다'는 생각을 하며 한없이 무거운 발걸음 그래도 가볍게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권사님의 말씀이 계속 귓전을 때렸습니다.

"새로운 예배당에 가서 단 한 번만 우리 하나님께 예배하고 가면 더 이상 원이 읎것으라우……"

지난 주, 2차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예수병원에 입원하신 권사님을 교우들과 찾아뵈었을 때, 예전보다 많이 평안해 보여서 마음 한 편으로는 위로가 되었지만 항암치료 때문에 머리가 다 빠져 버려 절간의 비구니처럼 되어 버린 권사님의 모습을 뵙기가 너무 민망하여,

"권사님, 머리카락 빠지신 후에 보니까 두상이 정말 예쁘시네요. 전에는 잘 몰랐었는데……"

이렇게 반 농담으로 안타까운 상황을 넘겨보려다가 그만 울컷 치솟는 눈물을 삼키고 숨기느라 몹시 힘들었습니다.

김옥순 권사님……
10년 세월을 한결같이 말없이 곁에 서 주시고, 부족한 목사와 아직은 여린 우리 교회공동체를 한없이 자랑스러워 하시는 분…… 권사님은, 하나님께서 제 곁에 보내주신 참으로 귀한 동역자, 하나님의 사람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예수 믿고, 좋은 목사님과 좋은 교회 만나 저처럼 복 받은 사람이 또 어디 있대유? 새로운 예배당에서 하나님께 예배 한 번만 드렸으면 정말 원이 읎것는디, 그럴 기회를 우리 아버지께서 주실랑가 모르것어유……"

무능한 종은 권사님을 위해 새벽마다 눈물로 그저 이렇게 기도할 뿐입니다.

"부활의 능력이신 주님, 우리 김옥순 권사님께 오늘도 하늘의 새 힘을 부어 주소서. 주께서 사랑하시는 여종의 눈물 어린 기도를 부디 들어 주소서.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 당신의 여종에게 시간을 조금만 더 허락하여 주소서……"

전주열린문교회 이광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