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10년쯤 전에 길거리 노점상에서 5천 원짜리 꽃자주색 폴라 면티셔츠를 하나 샀습니다. 우연히 길을 가다가 싼 맛에 그냥 하나 사 본 것이기 때문에 일종의 충동구매였던 셈인데, 막상 사서 입어 보니 옷의 질감이 얼마나 부드럽고 좋은지, 그 옷을 입을 때마다 이상하리 만치 끝없이 밀려오는 편안함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옷 한 벌을 찾아 입으면 그것으로 대충 한 철을 나는 묘한 습성, 아주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한 번 들른 가게만을 끝까지 찾아가는 저의 별난 버릇 탓인지, 다른 어떤 옷보다도 저는 그 꽃자주색 티셔츠를 즐겨 입었습니다. 세월 따라, 옷감의 색이 조금씩 바래기 시작하고, 옷감의 탄력이 차츰 떨어져 여기저기 옷의 본 모양이 적잖이 변했어도 그 옷이 주는 편안함은 조금도 변함이 없어서, 언제부터인지 그 옷은 아예 저의 소중한 잠옷이 되고 말았습니다. 거의 사시사철 그 빛 바랜 꽃자주색 티셔츠 하나만을 즐겨 입는 모습을 본 아내는 늘 입버릇처럼 “그런 티셔츠 눈에 띄면 한두 벌 더 사보자”고 하였습니다. 워낙 오랜 세월 줄기차게 입다 보니, 군데군데 바느질 실밥까지 흐물흐물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이제 그만 내 버리고 다른 셔츠를 하나 사자”는 아내의 말이 나올 때마다 저는 “그 옷 내 허락 없이 절대 버리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곤 했습니다. 결국 아내의 성화를 견디다 못해 얼마 전 큰 아쉬움 속에 그 옷을 버리고 새로운 면티셔츠를 하나 사오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너무 낡아 없애 버린 그 옷만은 못해 지금도 마음 한 쪽이 허전하고,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그 옷 생각이 여전히 간절합니다.
대형 시장이나 백화점 같은 데 가 보면, 한 벌에 몇 만원 혹은 몇 십 만원서부터 몇 백 만원을 훌쩍 넘기는 이른바 명품들이 많습니다. “싼 게 비지떡”이라느니, “누가 뭐래도 비싼 옷은 돈 값을 한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니겠지만, 10년 가까이 제가 줄기차게 입었던 그 싸구려 티셔츠를 미루어 보면, 그런 주장이 무조건 맞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비록 ‘짝퉁’일 망정 명품 딱지 붙은 것이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도 많지만, 값이 비싼 것이 무조건 좋다거나, 명품이면 무조건 자신에게 잘 어울리리라는 허튼 생각은 우리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명품’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 사람들로부터 지속적으로 좋은 평을 받아온 결과 어느 날 ‘명품’으로 불리게 되는 것이라면, 비록 싸구려이기는 했지만 저에게는 그 꽃자주색 티셔츠가 지금껏 제가 입은 옷 중에 최고의 명품, ‘나만의 소중한 명품’이었던 셈입니다. 옷 한 벌과 사람의 만남처럼, 사람과 사람의 만남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많이 배우고 못 배우고, 잘나고 못나고를 떠나서, 한 번 만남이 평생 흐트러짐 없이 이어지는 관계, 함께 뒹구는 험한 세월이 더할수록 더더욱 편안해지는 관계처럼 복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만나는 모든 분들 앞에 저의 ‘꽃자주빛 셔츠’처럼 늘 ‘편안한 사람’으로서 ‘진정한 명품 인생’이 되고 싶습니다. (2004. 7. 19.)
* CBS 라디오 에세이(2004. 7. 19. 밤 11:55 방송) 원고
* 이광우 목사의 라디오 에세이 : 매주 월요일 밤 11:55
FM 103.7 MHz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