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30년 전 이야기지만, R.O.T.C. 후보생 2년차 시절, 소위 임관을 반년쯤 남겨둔 대학 4학년 여름방학 때 육군 제 35 사단에서 마지막 병영훈련을 받았습니다. 2년차 훈련과정에는 야외 학과출장이 많았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과목이 중소대전투를 위한 실외학습으로 짜여져 있었기 때문에 거의 매일같이 구보로 사단 주변의 야산에 나가 다 큰 청년들이 M-1총을 들고 때로는 몹시 멋쩍은 ‘병정놀이(?)’를 연습했습니다. 고난도 훈련은 아니었을지라도 당시 우리 장교후보생들은 피교육생 신분인 까닭에 한여름 날씨에도 늘 춥고 배고프고 고달팠습니다. 더군다나 그 해 5월 총장기쟁탈 체육대회 때 그만 오른쪽 발목에 골절상을 입고 무려 16바늘이나 꿰매는 큰 수술을 받아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목발을 짚고 머나먼 훈련장까지 혼자 쫓아 다녀야 했던 저에게는 별로 길지도 않은 한 달이 마치 지옥의 수렁을 헤엄치는 듯이 지루하고 고통스럽기만 했습니다.
야외훈련장에 나가 훈련을 하다가 점심 시간이 되면 피교육생들이 먹을 점심을 실은 사단 취사부의 트럭이 반갑게 도착합니다. 당시만 해도 군대밥이란 게, 고기류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고, 어쩌다 고깃국이 나오더라도 대개는 고기가 그냥 목욕하고 지나간 듯 국물만 훌렁거리기 일쑤고, 어쩌다 좀 그럴 듯한 무 깍두기라도 나왔다싶어 좀 자세히 보면 무와 큼지막한 고춧가루가 제멋대로 따로 놀고, 밥을 먹어도 숟가락을 놓는 순간부터 다시 배가 고파올 정도로 헤프고 어설프기 그지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나마도 그저 많이만 주면 감지덕지, 어쩌다 내 식판에 밥 한 숟갈이라도 더 들어온 성싶으면 마치 천하를 얻은 듯 기쁘고, 좀 적은 듯 싶으면 주걱질하는 취사병이 하염없이 원망스럽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초포다리 건너 야산에서 중대전투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식사추진 트럭이 도착한 때부터 얄궂게도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식판 한쪽에 국물을 받아놓으면 머리에 눌러쓴 철모를 타고 흘러내린 빗물로 국물 양이 순식간에 반 이상 늘어나 부지런히 먹어도 국물이 줄지 않을 정도로 하늘이 구멍난 듯 장대비가 쏟아졌습니다.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국물 반 빗물 반의 국물에 밥을 말아 몇 숟갈 둘러 마시려는데 옆에 앉은 친한 동기생이 씩 웃으며 군복 위 호주머니에서 큼지막한 풋고추 하나를 꺼내 건네주었습니다. 친구가 하는 대로 휴대용 군용숟갈로 그 풋고추를 국물에 넣고 대충 짓이겨 넣고 먹어보니 순식간에 세상에 둘도 없는 천하일미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요즘 웰빙이다 다이어트다 뭐다 해서 먹을거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무척 높습니다. 좋은 식당이 있다는 입 소문이 들려오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지체 없이 달려가 기어코 맛을 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식도락가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름난 음식을 먹어도 30년 전 장교후보생 시절 산비탈 폭우 속에서 식판에 풋고추 하나 짓이겨 넣어 먹던 그 ‘국방부 훌렁탕’의 맛에는 까마득 미치지 못합니다. 열심히 땀 흘리며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 일하는 사람들은 풋고추 딱 한 개만으로도 늘 천하진미를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05. 4. 25.)
* 이광우 목사의 CBS 라디오 에세이 : 매주 월요일 밤 11:55, FM 103.7 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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