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아들놈과 장기를 두어 보기 좋게 한 판 나가떨어졌습니다. 제 나이 마흔 살에 하나님께서 늦둥이로 주신 막내아이가 벌써 열두 살,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습니다. 형도 없고 남동생도 없어서 그런지 아비인 저를 늘 형 따르듯 가까이하는 살가움이 유난히 많습니다. 어린 시절 제 아버님께서 장남인 저에게 장기를 가르쳐 주시던 그 마음과 얼추 비슷한 생각으로 두어 해 전부터 재미 삼아 막내에게 장기를 가르쳤습니다. 장기짝에 있는 한자를 겨우 깨우친 아이와 마주 앉아 두는 장기, 늘 싱겁기 그지없지만 아들놈은 아빠와의 겨루기에 제 나름대로 늘 최선을 다하는 눈치였습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아이도 바쁘고, 저 또한 교회 안팎에서 주어진 일이 만만치 않아 서로 얼굴 마주 대하는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어 안타까운데, 모처럼 아빠가 집에 있는 성싶으면 아빠에게 “장기 한 판 어떠시냐”는 말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장기판을 벌여 놓고 조용히 앉아 있습니다. 잘 정돈된 장기판 앞에 대국상대도 없이 말없이 앉아 그저 아빠와 눈이 마주치기만을 마냥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 꼼짝없이 장기판에 마주 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두는 족족 아빠에게 무참히 당하면서도 아이는 아빠와 마주앉는 것을 마냥 좋아합니다. 작년에는, 아빠를 이기는 게 목표라며 학교 특별활동 부서 중에 장기부에 들기도 했습니다. 장기를 만지작거리는 햇수가 늘어나면서 이젠 제법 꼼수도 쓸 줄 알고 뜻밖의 함정을 파서 아빠를 놀래주는 일이 종종 있어도 승부는 늘 그렇고 그렇습니다. 장기판 앞에서 한치 양보 없는 부자의 실랑이를 곁에서 지켜보며 아내도 늘 재미있어합니다. 하여튼, 작년 봄엔가 잠시 딴 생각을 하다가 아이에게 딱 두 판 진 적이 있는데 이번에 세 번 째 패배를 당하고 만 것입니다. 아빠를 이기고 한껏 의기양양해서 큰소리 땅땅 치는 아들놈을 보며 아내가 “당신이 혹시 져 준 것 아니냐”며 나직이 물어왔습니다. 장기를 둘 때마다 어린 자식을 사정없이 짓뭉개버리는 매정한 아빠를 보며 아내가 “그냥 한 판 져 주지 그러시냐”며 핀잔을 줄 때마다 “제 힘으로 이겨야 진짜 기쁜 것”이라며 더 매몰차게 아이를 몰아쳤습니다. 아무튼 막내 놈에게 보기 좋게 나가떨어지고 어이없어하는 저를 보며 “정말 져 준 것 아니냐”고 아내가 다시 묻습니다. 장난기가 한껏 발동되어 궁금해하는 아내에게 “정말로 실력껏 해서 졌다”고 하자 뜻밖에 아내가 샐쭉해졌습니다. 자식놈이 이기는 것은 좋아도 자기 남편이 너무 일찍 지기 시작하는 것이 은근히 좀 서운했던 모양입니다. 입춘이 지나면서, 쏟아지는 눈보라 속에서도 봄기운은 느껴지더니 뒷산 솔숲의 푸름새가 많이 산뜻해졌습니다. 묵은 잎 떨구고 새순 돋울 준비를 하는 것이겠지요. 묵은 손톱 빠지고 새 손톱 나듯, 자식이 태어나고 자라 아비를 웃도는 실력이 몸에 배면서 세월은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쑥쑥 크는 막내아들놈처럼, 동장군의 철갑옷을 뚫고 들판 가득 꼼질꼼질 돋아나는 봄나물처럼, 해묵는 아쉬움이 움돋는 새순 지켜보는 큰 기쁨을 도저히 이기지 못하는 낙낙한 새봄이길 바랍니다.(2006. 2. 16.)
이광우 목사의 CBS '5분 메시지' : 매주 목요일 오후 1:55, FM 103.7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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