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 없이 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대문도 있는 둥 마는 둥 1년 365일 대문을 대충 열어놓고 지내던 시절이 분명 있었습니다. 울타리도 그저 싸리나무 가지를 듬성듬성 얼기설기 대충 엮어 세워놓는 게 전부였습니다. 지지리도 가난해서 말 그대로 초근목피로 목에 풀칠 근근히 하면서도 내 집에 들어오는 이는 동냥아치조차도 함부로 내치지 않고 먹다 남은 찬밥덩이 하나라도 들려서 따뜻한 마음으로 내보내는 게 우리네 인심이었습니다. 너나없이 내 집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 썰렁하게 내보내는 것은 사람된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착하게만 살았던, '전설의 고향'같은 시절이 바로 엊그제였습니다. 그런 시절에 가을걷이가 끝난 늦가을 무렵부터 농한기가 시작되면 시골마을에는 하나 둘씩 방물장수들이 나타났습니다. 좀 큼지막한 보퉁이에 바늘이나 실, 골무 같은 생필품에서부터 시골 장터에서는 좀체 구경하기 힘든 좀 신기한 머리핀이나 참빗, 좀약 같은 잡다한 물건들을 싸들고 동네에 들어와서 아무 집에나 들어가 하루 이틀 신세를 지면서, 어느 새 소식을 듣고 하나 둘씩 모여든 시골 아낙네들에게 그것을 팔았습니다. 그 시절에는 방물장수가 와서 며칠 머무는 동안 집 주인은 밥값을 받지도 않고 숙박료를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다 방물장수의 마음이 동하여 감사의 표로 보퉁이에 싸 들고 온 물품 한두 가지를 주어도 대개는 극구 사양하며 그저 자기 집에 온 손님 따순 밥 한 그릇 먹여 보내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네 것 내 것을 까락까락 따지지 않고 그저 모든 것이 다 '우리 것'일 뿐이었습니다. 산업화에 이어 서구의 개인주의가 빠른 속도로 우리 사회에 들어오면서 그것의 어두운 면만 아주 발빠르게 우리 사회의 안방을 사정없이 후비고 들어와 버렸습니다. '우리'라는 공동체 개념이 흐려지면서 '가족'도 없고 '너'도 없고 오직 '나'만 존재하는 살벌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개인주의의 부정적인 후유증이 끊임없이 지역이기주의를 부채질하는가 싶더니 이제는 아예 '동네 이기주의'라는 살벌한 말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사람 다니고 차 다니라고 만든 도로인데, 자기 동네 앞길이라 해서 함부로 막아놓고 장의차를 지나가지 못하게 행패를 부리고, 사랑하는 이를 잃고 슬픔에 젖어 있는 이들의 약점을 끈질기게 물고늘어지며 '마을발전기금'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뭉칫돈을 뜯어냅니다. 조금 쉴 만한 개울이나 나무그늘에서 자릿세를 뜯는 일이 어디서나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산골짝 작은 동네에도 어김없이 주차료를 내라며 손을 내미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그런 짓하면 내가 다른 동네에서 똑같이 험한 꼴을 당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합니다. 나 사는 곳 아니라고 함부로 쓰레기를 몰래 내버리고 오는 것만큼이나, 우리 고장을 찾은 사람에게 막가는 태도로 대하는 것 역시 아주 질이 나쁜 것입니다. 어쩌다가 그만, 호기심 가득 담긴 꿈의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우리 마을을 찾아오던 뜨내기 방물장수가 무던히 그리운 시절이 되고 말았습니다.(2006. 11. 9.)
이광우 목사의 CBS '5분 메시지' : 매주 목요일 오후 1:55, FM 103.7Mhz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