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백년 또는 몇 천년 뒤의 지구촌을 배경으로 한 SF영화를 보면 사람들의 생김새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허무맹랑한 진화론을 전제로 한 탓이겠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머리통이 엄청나게 크고 다른 기관들은 형편없이 작아진 기괴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오직 ‘편리함’만을 최고 덕목으로 생각한 나머지 모든 생활도구들이 기계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손과 발을 꼼지락거릴 일이 차차 적어지는 흐름을 극단적으로 유추해낸 결과 그런 인물상을 창출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인간의 몸은, 사용하지 않는 기능은 차츰 쇠퇴해 버리는 참으로 신비한 생명체입니다. 고등학생 시절,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에 진학할 꿈을 접은 채 은행원을 목표로 삼고 지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대학을 졸업하는 사람의 비율이 고교졸업생의 10% 정도였기 때문에 고교 졸업장을 가지고도 은행에 입사할 수 있는 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은행에 취업하기 위해서 열심히 복식부기를 공부하여 자격증을 딴 다음 주산 또한 열심히 훈련하여 고등학교 1학년말에 2단 자격증을 받았습니다. 주산 유급자 시험과 달리 유단자 시험에는 암산 종목이 있어서 암산 종목의 점수가 나오지 않으면 유단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주산 7단이나 8단 정도가 되면 십억 단위 15줄로 되어있는 덧뺄셈 문제 10개를 암산으로 답을 내는 데 약 10초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처음 나오기 시작한 전자계산기의 달인과 주산 고단자들의 연산능력을 비교하는 시합이 종종 있었는데 전자계산기를 아무리 빠르게 두드려도 주산 고단자들의 암산능력은 도무지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은행에서도 주판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 또한 전자계산기를 만지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주산 2단의 알량한 암산 능력마저 거의 바닥나고 말았습니다. 내내 사용하던 PDA에 네비게이션 기능이 추가되면서 두어 달 전부터 그것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오늘날 위성정보통신이 얼마나 많이 발달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네비게이션의 길 안내가 너무도 세밀하고 정확해서 현지에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길잡이가 되는 것에 감탄하는 한 편, 네비게이션에 의존할수록 한두 번 지나온 길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저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공수특전단 장교로 군복무하던 시절 천리행군 때마다 강원도 태백산맥의 험산들을 지도와 나침반 하나만 달랑 들고도 내집처럼 잘도 찾아 다녔고, 평소 길눈이 유난히 밝다는 소리를 늘 들으며 지냈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저 또한 ‘길치’가 되지나 않을까 은근히 조심스럽습니다. 핸드폰에 전화번호들을 기억시키기 시작하면서 줄줄이 외우던 지인들의 전화번호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람들의 탄식에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는 달리 인간이 하는 일은 늘 생명과 죽음을 동시에 가져온다”는 어느 신학자의 예리한 지적이 생각납니다. 앞을 향해 내달리는 틈틈이 한번씩 짐짓 뒷걸음질하는 삶의 지혜가 더더욱 필요한 시대입니다.(2006. 8. 3.) 이광우 목사의 CBS '5분 메시지' : 매주 목요일 오후 1:55, FM 103.7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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