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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14] 가난한자와 병든 자와 죄인들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마 9:12,13 눅 6:20,21) - 오산 진성 교회


제가 2008년 1월 13일 강변교회에서 은퇴한 후 지난 11년 7개월 동안 주일마다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주로 방문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오늘 2019년 7월 14일 주일 오산 진성 교회에 처음으로 와서 설교를 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윤영호 목사님과 성도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윤영호 목사님이 오늘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씀을 전해 달라고 부탁을 해서 오늘 제가 아주 좋아하는 마 9:12,13 말씀을 본문으로 “가난한자와 병든 자와 죄인들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사실 이와 같은 제목으로 작년 즉 2018년 3월 18일 주일 황등 제자교회에 가서 설교를 했는데 오늘 그 때 한 설교를 거의 그대로 약간 수정 보완해서 하려고 합니다.





첫째로, 가난한 자들에 대한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들은 가난을 싫어합니다. 우리들은 부요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부요하신 성자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 성자 예수님께서는 이런 고백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 8:20). 사실 성자 예수님께서는 부자들보다는 가난한 자들에게 성부 하나님께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축복의 손길을 펴신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6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눅 16:19-25).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그의 공관복음 주석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비유로만 보는 것은 잘못이고 사실로 보아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가난과 겸손의 신앙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혹이 여기 있는 말씀을 비유로만 보나, 터툴리안과 암브로스는 이것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 하였고 칼빈도 그리하였다. 이 말씀에 나타난 요긴한 교훈은 이러하다. 본장 첫 머리에서(1-13) 예수님은 사람이 재물을 지혜 있게 쓰므로(곧 구제에 써서) 하늘 나라의 상급이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을 가르치셨다. 그 교훈에 이어서 그는 재물로써 구제하지 않는 자의 받을 벌이 어떠할 것을 여기서 알려 주신다. 재물은 이렇게 위태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재물로 인한 범죄의 위험을 가르친 것뿐 아니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와의 분별을 보이신 것이다. 나사로는 믿는 자의 표상이니 그것은 “아브라함의 품”(믿음의 자손이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간 곳에 가는 것을 가리킴)으로 갔다는 말씀이 잘 가리킨다(22절). 그리고 부자는 믿지 않는 자의 표상이니, 그것은 그가 얼마나 “호화로이 연락한” 생활을 하였다는 말씀이 증거한다(19절). 불신앙은 스스로 의롭다 하고 그것으로 즐기고 잔치한다. 그와 반대로 신앙이 있는 자는 거지 나사로처럼 겸손하여 낮은 자리에서 끝까지 참고 견딘다. 나사로의 믿음은 겸손에 나타났다.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어떤 사본에는 이 어귀 앞에 “아무도 그에게 무엇을 주지 않더니” 라고 하였다. 그가 너무도 주려서 개들이나 주어먹는 떡 부스러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것을 보면 그의 심령이 매우 겸손하였다. 이 거지는 개의 압박도 견디는 겸손을 가졌다. 그는 말없는 성자였다. 모든 것에 견디고 불원천 불우인으로 침묵하였다. 천국에 들어간 후에 지옥에 간 부자의 무리한 청원에도 그는 침묵하였다(24절). 플러머(Plummer)는 나사로의 침묵의 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그는 부를 인간들에게 나누어주신 하나님에게 대하여 원망하지 않았고, 그 부자가 돈을 그릇되게 사용함에 대하여도 불평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내세에 들어간 후 자기와 그 부자의 형편이 변동된 일에 대하여 어떤 통쾌감을 발표하지도 않고 음부에 간 그 부자가 그를 사환으로 청할 때에도 그는 반항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아주 긴 글을 인용했는데 배울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팔복의 말씀을 하시면서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1-3). 누가복음에서는 “심령이” 라는 말을 빼고 그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눅 6:20,21).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부자교회였던 라오디게야 교회를 향해서는 책망의 말씀을 하셨고 가난과 궁핍과 환난 중에 있던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는 칭찬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계 2:9). 여기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는 말씀은 물질적으로 부요한 자라는 말씀이 아니고 영적으로 부요한 자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가문과 학문과 부요 등을 자랑하던 세속적인 사람이었는데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가난과 고난을 예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난을 귀중하게 여기면서 가난을 예찬했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8:1,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 여기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라는 말씀은 물질적으로 부요케 하신다는 말씀이 아니고 영적으로 부요케 하신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면서 자랑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거지 나사로와 사도 바울의 뒤를 따라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께서는 가난과 고난을 예찬하면서 가난과 고난을 몸에 지니고 가난하게 거지처럼 사셨습니다.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께서는 “가난을 나의 애처로” “고난을 나의 스승으로” 삼는다고 고백하시면서 사셨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죽음을 나의 자매” 라고 고백하고 손양원 목사님은 죽음을 “나의 소원” 이라고 고백하면서 사셨습니다.  이성봉 목사님께서는 한국교회의 최고의 부흥사였는데 거지처럼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사례비를 집으로 가져오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가난한 교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셨습니다. 결국 자녀들이 제대로 교복을 사서 입지도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이성봉 목사님께서 가지고 있던 작은 집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이상하신 분이셨고 성자 예수님을 따라서 그 분의 제자들로 사신 분들도 참으로 이상하신 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와 빌리 그레함 목사님의 존경을 받으시던 한경직 목사님과 “작은 예수” 라고 불리던 장기려 박사님께서는 3무 4무 5무의 극히 가난한 삶을 사시다가 빈 손으로 세상을 가볍게 떠나셨습니다. 진짜 기독교는 참으로 이상한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성자 예수님께서는 또한 건강한 자들보다는 병든 자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축복의 손길을 펴신 이야기들을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9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 9:12). 건강한 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예수님이 쓸데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좀 이상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가까이 하시면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신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병든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8장과 9장에 기록되어 있는 병든 자들 고침의 이야기들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마 8:2,3).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마 8:14,15).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마 9:2,6,7).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0-22).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가실쌔 두 소경이 따라 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마 9:27-30). “저희가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벙어리 된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귀신이 쫓겨나고 벙어리가 말하거늘 무리가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다 하되”(마 9:32,33).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 9:35)


성자 예수님께서는 나중에는 극심한 병을 몸에 지니는 것이 힘든 일이지만 우리 죄인들에게 있어서 영적으로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너무 많이 받아서 자신을 자랑하고 또 자랑하는 교만한 사람이 도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성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육체의 가지 곧 불치의 병을 지니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처음에는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라나 나중에는 자기가 불치의 병을 몸에 지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고 불치의 병을 인해서 기뻐하며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7-10). 사도 바울은 마지막에 불치의 병 즉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몸에 지니고 살면서 더욱 더 겸손하고 온유하고 착하게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복음만 전하다가 결국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총신에서 교수 생활을 하면서 고후 12:10절 말씀을 너무너무 좋아했는데 3학년 학생들이 고후 12:10절 말씀을 액자에 써서 저에게 졸업 선물로 주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뒤를 이어서 불치의 병들을 몸에 지니고 살면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사랑과 받으면서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과 사랑을 몸으로 전하면서 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합니다.


찬송가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패니 크로스비는 낳은 지 몇 주 만에 맹인이 되어서 95년 동안 평생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맹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패니 크로스비는 이 세상에서 제일 많은 찬송가를 쓴 찬송가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의 가슴과 그가 쓴 찬송가에는 주님 사랑과 천국 사모로 가득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다시 태어나도 맹인으로 태어나기를 바란다는 놀라운 고백까지 했습니다. 그가 천국에 이르러 그의 눈으로 제일 먼저 보기를 원하는 것이 주님의 얼굴이기 때문이라는 설명까지 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9천여 개의 찬송시를 썼는데 우리 나라 찬송가에도 23개나 포함되어있습니다. 저는 그 찬송들을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그녀가 92회 생일을 맞았을 때 그의 생일을 축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내게 데려오세요. 그 사람과 악수하고 싶어요.” 맹인 패니 크로스비는 주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사랑과 받으면서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과 사랑을 몸으로 전하면서 산 너무너무 귀중하고 너무너무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젊었을 때부터 폐결핵 말기 진단을 받고 평생 각색 질병을 몸에 지니고 힘들고 괴롭게 살았는데 그의 생애의 마지막 2년 동안은 노환으로 심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두 다리를 수술하는 고통도 겪었고 말을 잘하지 못하는 답답함도 당했습니다. 마지막 6개월 동안은 가래가 너무 끓어서 목에 구멍을 뚫고 지내는 극심한 괴로움도 겪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저의 손을 붙잡고 “늙는 것이 재미 없어!” 라고 그의 노약의 서글픈 심정을 토로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각색 질병이 한경직 목사님으로 하여금 온유 겸손 긍휼 용서 자비 사랑 화해와 평화를 몸에 지니고 가볍고 청렴하게 살게 하는 영적인 활력소와 보석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평생 병든 자들과 가난한 자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면서 따뜻하게 사셨습니다. 결국 한경직 목사님은 만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면서 한 평생을 행복하게 사셨습니다.


조니 에릭슨은 장래가 촉망되던 예쁜 소녀였는데 다이빙을 하다가 머리를 부딪혀서 전신 마비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도 자신도 모두를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몸에 지닌 장애의 고난과 슬픔과 아픔이 결국에는 보석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조니 에릭슨은 몸도 손도 발도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의 몸을 가지고서도 천사와 같은 아름다운 얼굴과 목소리로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를 드리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영혼으로부터 울어 나오는 노래와 간증과 입으로 붓을 물고 그린 그림 등은 너무너무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작품들이 되었습니다. 빌리 그래함 박사님 하고 간증도 했습니다. 불우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격려와 도움의 손길을 펴기도 했습니다. 저는 조니 에릭슨의 간증을 직접 두 번 들으면서 마치 천사의 모습을 보는 듯 했습니다. 너무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불치의 병과 약함을 지닌 조니 에릭슨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받은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과 사랑을 몸으로 전하면서 사는 너무너무 귀중하고 너무너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닠 부이치치는 두 팔도 두 다리도 없지만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니고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수년 전에 닠 부이치치를 대구에서 만났는데 그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했고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닠 부이치치는 지금도 세계 곳곳을 찾아 다니면서 절망 중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며 소망과 용기를 불어넣는 소망과 행복의 천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이 주신 기쁨과 위로를 전할 수 있어 너무 감사합니다.” “나 역시 많은 사람들이 들려주는 역경 스토리를 통해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너무너무 귀중하고 보배로운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치의 병과 약함을 지닌 닠 부이치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받으면서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과 사랑을 몸으로 전하면서 사는 너무너무 귀중하고 너무너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송명희 시인은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입으로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하면서 하나님께 온 몸으로 소리지르며 감사와 찬양을 드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 사무길 근처에 살고 있는데 요사이는 몸이 너무 아파서 고통스러워 합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순수하고 아름답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순수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별로 좋지 않다는 말도 합니다. 송명희 시인은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약함을 통해서 오히려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주님의 모습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송명희 시인의 수많은 찬송시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너무너무 귀중하고 아름다운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말 건강한 자들보다는 병든 자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축복의 손길을 펴시는 참으로 이상하신 분이시라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 의인들보다는 죄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축복의 손길을 펴신 이야기들을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선언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3).


예수님께서 죄인인 한 여자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축복의 손길을 펴신 이야기를 눅 7장이 길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눅 7:36-50).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을 귀중하게 보시면서 사랑하신다는 말씀도 눅 15장 한 장에서 아주 길게 하셨습니다. 그대로 인용합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1-32). 너무너무 귀중하고 은혜롭고 감사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가 거의 매일 기도하는 기도의 한 마디는 “하나님 아버지, 못된 탕자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시며 즐거워하신 하나님, 부족한 죄인을 안고 즐거워하시옵소서” 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직접 죄인인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셔서 세리장 죄인을 축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5-10).


요한복음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함께 죄 사함과 치료의 손길을 펴신 이야기들을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성에 살던 남편 다섯을 두었던 부도덕한 죄인인 한 여인을 찾아 일부러 수가성 우물가로 가서 그 여인을 기다리시다가 그 여인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시며 그 여인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함께 죄 사함과 치료의 손길을 펴시므로 그 여자의 삶과 운명이 바뀌어진 이야기를 요 4장이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요 4:14-19).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 4:28-30).


그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간음 현장에서 잡힌 죄인인 한 여자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함께 사죄의 은혜를 베푸신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8:3-11).


죄인 중의 죄인이었던 죄인중의 괴수라고 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그리고 일곱 가지 죄악에 늪에 빠졌던 막달라 마리아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죄악의 늪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지옥의 저주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인간 쓰레기였던 막달라 마리아의 죄를 그저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가장 귀중하게 보시면서 뜨겁게 사랑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망극하신 사랑과 은혜로 막달라 마리아는 성모 마리아와 사도 요한과 함께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을 생생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예수님의 무덤을 제일 먼저 찾아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울게도 되었습니다.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나타나서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라는 사명을 주신 사람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요한복음 20:16이하의 말씀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이는 선생님이라)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요 20:16-18).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말 의인들보다는 극심한 죄악에 빠졌던 죄인들을 더욱 더 뜨겁게 사랑하셨습니다.


사울이야말로 그와 같은 부류에 속한 죄인중의 괴수였습니다. 사울은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서 죽인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옥에 가둔 죄인중의 괴수였습니다. 그런데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이 풍성하신 예수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라고 부드럽게 부르시고 사도의 직분까지 맡겨주시고 그리고 마지막까지 극진한 사랑과 은혜를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너무너무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길선주 도사와 이기풍 깡패 두목도 죄인중의 괴수였습니다. 그런데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이 풍성하신 예수님께서 “길선주야 길선주야” “이기풍아 이기풍아” 라고 부드럽게 부르시고 한국교회의 아버지들로 삼아주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물론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이상하신 놀라우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의인들보다는 죄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축복의 손길을 펴시는 너무너무 이상하신 놀라우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렇게 찬송을 부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못하네”(404)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아와”(405)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410장).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십니까? 아니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십니까” 성자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고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이시고,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분이시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도와주시고 기도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결론적으로 한 마디 하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모두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고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고 구원하시는 너무너무 고마우시고 너무너무 놀라우신 분이십니다. 이제 찬송가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404) 1절과 “나 같은 죄인 살리신”(405) 1절과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410장) 1절을 함께 부르시고 기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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