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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과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 영성을 염원하며” 대담 김영한 박사 김명혁 목사




십자가는 기독교의 핵심이고 성경의 핵심입니다. 기독교에는 물론 중요하고 좋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귀한 가르침도 있고 고상한 사랑의 윤리도 있고 철저한 사회정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은 엄격히 말해서 고귀한 가르침도 사랑의 윤리도 철저한 사회정의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들의 운명과 삶을 변화시킵니다. 저주가 축복으로, 미움이 사랑으로, 원수 맺음이 화목으로, 이기적인 삶이 이타적인 헌신과 나눔과 희생의 삶으로 바뀌어집니다. 십자가 아래서 강도와 로마 군인들의 운명이 변화되었고, 사도 바울의 운명과 삶이 변화되었고, 어거스틴과 루터와 진젠돌프의 운명과 삶이 이 변화되었습니다. 저는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저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항상 새로운 은혜와 감동을 받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비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곳이고,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며, 동과 서가 만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항상 십자가 그늘 아래 있기를 소원합니다. 십자가 뒤에 숨기를 바랍니다. 저는 십자가만은 사랑하고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십자가만을 전하기를 소원합니다.


저는 십자가의 복음을 귀중하게 여기면서 십자가를 주제로 한 책들을 모아서 읽었습니다. 존 스토트, 로이드 존스, 얼 데이비스, 레온 모리스 등 저명한 학자들이 쓴 십자가를 주제로 한 책들 십여 권 이상을 모아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을 깊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강변교회에서 목회할 때인 2001년 1월부터 2001년 7월까지 “십자가와 나” 라는 주제를 가지고 15번 연속 설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 한 설교 제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운명의 변화” “하나님의 지혜” “사랑의 극치” “찬양의 주제” “복음의 핵심” “행복에의 길” 등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나』 라는 제목으로 설교집을 출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핵심이고 성경의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에는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드리지도 않았고 강력하게 거부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을 때 사울은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아 사울아” 라고 자기를 부르시는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서 십자가만을 알고 십자만을 전하기로 작정했다고 선언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1,2). 설교할 때 로마의 유창한 웅변술도 헬라의 심오한 지혜도 모두 내어 버린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유익하게 생각하던 것을 다 해로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9). 그리고 십자가의 흔적을 자기 몸에 지닌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세상의 각종 유행에 치우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로마의 웅변술에 치우치고 소위 헬라의 지혜에 치우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회사와 학원의 각종 프로그램에 치우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옥한흠 목사님이 교회가 왜 학원처럼 무슨 강의와 프로그램이 그렇게 많으냐고 비판한 일이 있었습니다. 방지일 목사님도 왜 요사이 한국교회가 각종 프로그램과 시끄러운 음악으로 성령을 지배하려고 대드냐고 비판한 일이 있었습니다. 방지일 목사님은 자기가 아는 것은 딱 한 가지뿐인데 예수님께서 자기를 위해서 죽으시고 자기를 위해서 살아나셨다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핵심이고 성경의 핵심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지식과 학문도 포기한다는 충격적인 선언을 했습니다. “오늘날 지식과 학문을 탐구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저도 한 때는 책을 모아보고 싶은 유혹을 받았었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이여, 명심하여 들으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 무식하게 되는 사람이 진정 행복합니다. 지식처럼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 없고, 지식처럼 사람의 정신을 흐뜨러 놓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래 전에 성 프랜시스의 선언을 읽으면서 마음에 깊은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선언인지 모릅니다. 너무 올바른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면 십자가 영성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십자가 영성의 특징은 성공도 부귀영화도 장수도 아닙니다. 십자가 영성의 특징은 “가난”과 “고난”과 “죽음” 이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특징은 “가난”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본래 부요하신 분이신데 가난해지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예수님께서는 “가난”의 유익을 여러 번 지적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눅 16:22,23). 십자가 영성의 첫 번째 특징은 “가난”입니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신 최권능, 주기철, 손양원, 이성봉, 한경직 목사님과 장기려 박사님은 모두 “가난”하게 그리고 “청빈”하게 3무 4무 5무의 삶을 살았습니다.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은 “가난은 나의 애처” 라고 고백했습니다.  


십자가 영성의 두 번째 특징은 “고난” 입니다. 이사야는 메시야가 당하실 고난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유익을 여러 번 지적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0-12) (눅 16:25).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운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신 길선주, 이기풍, 최권능, 주기철, 손양원, 이성봉, 한경직 목사님과 장기려 박사님은 모두 “고난”의 삶을 사셨습니다.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은 “고난은 나의 스승” 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십자가 영성의 세 번째 특징은 “죽음” 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죽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 16:21).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유익을 여러 번 지적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25). 스데반 집사와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와 서머나의 감독 폴리캅과 토마스 선교사와 조만식 장로와 주기철 목사와 손양원 목사는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순교의 제물들이 되었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죽음은 나의 자매” 라고 고백했고, 주기철 목사님은 “일사 각오”을 지니고 칼날과 “죽음”을 행해서 달려간다고 고백했고, 손양원 목사님은 죽음을 자기의 “소원” 이라고 고백하면서 순교의 길로 기쁘게 달려갔습니다.


십자가 영성의 특징은 “가난과 고난과 죽음”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과 고난과 죽음”을 좋아하지 않고 싫어하면서 거부하고 반대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난과 고난과 죽음”은 아주 유익하고 귀중하고 보배로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들이 “가난과 고난과 죽음”을 우리들 몸에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지닌다면 우리들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아주 조금은 닮을 수 있고,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를 아주 조금은 닮을 수 있고, 성 프랜시와 최권능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장기려 박사님을 아주 조금은 닮을 수 있지 아니할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사랑으로 저와 여러분들이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을 귀중하게 여기고 사모하고 기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인용하면서 말씀을 맺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갈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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