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2월 17일, 필리핀 중부 레이테주에서 대규모 진흙 산사태로 긴사우곤 마을 일대가 흙더미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희생자 수는 줄잡아 3천 명쯤 된다고 합니다. 환경전문가들은, 레이테 남부 지역이 산사태에 취약한 대규모 단층지역인데다, 주요 태풍의 통과지점이며, 집중호우를 일으키는 라니냐 현상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이라는 지질학적 근본원인 외에도, 열대 우림의 무차별적인 남벌과 개발이 이번 산사태의 결정적인 원인이었음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번 산사태는, 1920년대 이후, 농가소득을 올리려고 코코넛 농장을 만들기 위해 레이테 남부의 열대 밀림을 무차별 남벌하며 자연녹지를 개간하고 뿌리가 얕은 코코넛을 대규모로 재배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필연적인 인재(人災)라는 것입니다.
산사태의 비극을 전하는 뉴스를 보면서, 불과 몇 십 년 전 유소년 기에 해마다 겪던 물난리와 산사태가 생각났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엄청난 폭격과 포격으로 산이란 산은 모조리 벌겋게 까뭉개져 어딜 가나 황토백이 민둥산뿐이어서, 미술시간에 산을 그릴 적마다 도화지에 삼각형 두어 개로 산 모양을 그려놓고는 거기에 열심히 황토색을 칠해서 미술선생님께 갖다 드리곤 했습니다. 너나없이 산에 있는 나무를 베어다 땔감으로 쓰고 심지어 솔잎을 비롯한 나뭇잎과 들풀까지도 모조리 긁어다 아궁이의 불을 지펴 입에 풀칠하며 살던 시절, 조금만 큰비가 와도 곳곳에서 산사태가 나고 하천이 벌겋게 넘치고 저수지 둑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장마철엔 마치 전쟁이라도 난 듯 이불 짐을 싸 대피할 준비를 해 놓고 언제 울릴지 모르는 대피 사이렌 소리에 온갖 촉각을 곤두새운 채 날밤을 새며 가위눌려야 했던 유년기의 두려움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다행히 제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1960년대 중반부터 공무원과 학생들을 동원하여 범국민적인 사방공사 사업을 시행하며 꾸준히 나무를 심은 결과 우리 남한 땅은 참으로 푸르고 싱그러운 숲의 나라로 다시 일어섰습니다. 숲이 우거지면서 산짐승 들짐승들도 다시 깃들기 시작하여 요즘은 산행 길에 야생 짐승들의 흔적 한두 개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른 바 웰빙시대에 웰빙문화를 충만히 누리고 싶어하는 현대인들이 주거환경을 어떻게든 친환경적으로 가꾸기 위해 무던히 애쓰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아픈 추억을 통해 자연과 인간이 함께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충분히 학습한 결과일 것입니다. 돈벌이가 된다고만 하면 그저 당장 코앞의 이익만을 생각한 채, 하나님께서 참으로 지혜롭게 만들어 선물로 주신 환경계와 생태계의 근본 구조를 겁없이 바꾸며 엄청난 규모의 난개발에 무작정 몰두하는 요즘, 필리핀의 이번 환경재앙이 멀리 떨어진 남의 나라의 일로만 결코 느껴지지 않는 것, 제가 유난히 애향심이 없고 소심해서 그런 것일까요? 아무튼, 이번 산사태로 사랑하는 이들과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필리핀 이재민들과 슬픔을 같이하며 그이들에게 멀리서나마 깊은 위로의 뜻을 전합니다. (2006. 3. 2.)
이광우 목사의 CBS '5분 메시지' : 매주 목요일 오후 1:55, FM 103.7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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