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40년 전, 한국전쟁의 심각한 후유증으로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던 시절,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중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할 뻔했던 저는, 입학시험을 치른 결과 다행히 장학금을 받게 되어 간신히 중학생이 되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 시절, 중·고등학생들이 입는 교복은 일본군 군복을 개조한 검은 색 제복 일색이었고, 남학생들은 너나없이 빡빡 깎은 까까머리에 일본군인들의 모자와 거의 같은 모양의 모자를 써야 했습니다. 그 무렵, 어려운 살림에 찌든 우리네 어머니들은 으레 한 2-3년씩 앞을 내다보고 자식들의 교복을 해 입히는 바람에, 갓 중학생이 된 우리들은 누구랄 것 없이 교복의 팔 소매와 바지 가랑이를 한두 번씩 걷어올린 꺼벙한 모습, 여전히 한심한 코흘리개의 모습이었습니다. 총 한 자루씩만 쥐어 주면 영락없이 일본군 병사인 칙칙한 검은 교복을 너나없이 새로 해 입은 우리들의 모습은 우리 눈에도 몹시 어설프기 그지없었습니다. 그 때, 매서운 겨울 추위가 아직 남아 있는 대운동장에 모여 몹시 발 시리고 한없이 지루하기만 했던 입학식에서, 우리 교장선생님께서 주셨던 말씀 한 마디를, 저는 40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말이 중학생이지 정말 어설프기 그지없는 우리들을 향해 교장선생님은, "이제 중학생이 된 여러분은 오늘부터 '꼬마 인격자'"라는 것을 내내 강조하셨고, 그 어르신이 하신 '꼬마 인격자'라는 말 한 마디가 그만 어린 제 가슴 깊이 꽂혔습니다. 아무래도 한낱 코흘리개에 불과했지만, 그 날 이후, 저도 몰래 초등학교 시절의 어설픈 버릇이 나오려 할 때마다, '꼬마 인격자'답게 의젓해 지려고 무던히 애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별 것 아닌 '꼬마 인격자'라는 존재 인식이 순간 순간 어린 저의 생활을 곧추 세우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송아지가 '음메∼'하고 열심히 울어서 소가 되는 것이 아니고, 소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우는 것처럼, '내가 누구인가'를 바로 알 때,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나의 '됨됨이'를 바로 알 때 비로소 나의 행동에 일정한 방향이 생긴다는 것을 중학교 1학년 코흘리개 시절부터 알게 된 것을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렇듯, 나이가 많든 적든 자기가 누구인지를 바로 아는 이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하며 살다가,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는지를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흘러, 그 어슬프디 어설픈 '꼬마 인격자'가 어느덧 '어른 인격자'가 되었고, 예수님을 만나 거듭난 후로는 '하늘 인격자' 곧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 제 안에 죄악의 옛 습성이 불거져 나올 때마다 저는 제 영혼에게 이제는 '하늘 인격자'라는 것을 점잖게 깨우쳐 주는데, 그때마다 거룩하고 정직한 제 삶의 자리로 재빨리 되돌아오는 은혜를 경험하곤 합니다. 무엇을 해야할 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아직 잘 모르신다면, 내가 누구인가를 먼저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행위로 존재를 얻는 것이 아니라, 존재(됨)가 행위(함)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4. 6. 7.)
* CBS 라디오 에세이(2004. 6. 7. 밤 11:55 방송) 원고
* 이광우 목사의 라디오 에세이 : 매주 월요일 밤 11:55
FM 103.7 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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